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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by 곰곰곰곰 2026. 5. 19.

★나의 한줄평: AI 시대의 사랑, 우정, 일... 그리고 사람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 민음사 독서모임 영상 보기 전에 읽고 보면 더 재밌겠다 싶어서 빌렸는데 처음에는 이 설정이 이해가 안 가고 병렬독서하는 책도 있어서 고민하다 속도가 붙으니 너무 재밌어서 쭉쭉 독파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는 모르는 작가인데 일본 이름이지만 글은 전혀 일본스러운 문체가 아니어서 그 점도 신기했다.

 

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 이렇게 해가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 운 좋은 날이면 나는 얼굴을 내밀어 해가 주는 자양분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 했다.

 

글은 소녀 에이에프인 '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가게에 진열된 에이에프인 나는 세상을 관찰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인공 지능 로봇이다. 이들은 태양광 흡수 기능이 있어서 매장 안에서도 해가 가장 잘 보이는 특별한 자리에 서고 싶어한다. 그리고 나(클라라)는 '조시'라는 소녀의 관심을 받게 되고 그녀에게 선택받아 집으로 가게 된다. 조시가 약속한 것은 해가 정말로 어디로 넘어가는지를 클라라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쇼윈도에 가고 싶어 한 데는 햇빛이나 선택받을 가능성과 무관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 대부분의 에이에프나 로사와 다르게 나는 늘 바깥세상을 아주 세세하게 보고 싶었다.

커피잔 아주머니가 RPO 빌딩 쪽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를 꼭 끌어 안았다. 해도 그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 위에 자양분을 한껏 쏟아부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는지도 몰라. 아주,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마지막으로 저렇게 서로 끌어안았을 때는 두 사람이 젊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두 사람이 서로를 잃어버렸다는 말인가요?"
매니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말했다. "응. 그럴 거야. 잃어버리고 살다가 방금 정말 우연히 다시 찾은 거지."
... "가끔, 이런 특별한 순간에 사람은 행복과 아픔을 동시에 느껴. 클라라, 이 모든 걸 주의 깊게 관찰하다니 장하다."

나는 내가 본 조시의 걸음걸이를 최대한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처음에, 내가 로사와 창가에 있을 때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던 모습, 그리고 나흘 뒤에 어머니가 어깨에서 손을 뗐을 때 창문으로 다가오던 모습, 그리고 방금 안도감과 행복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향해 서둘러 걸어오던 모습. 

그때 교류 모임에서 조시에게 왜 B3를 고르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묻자 조시가 웃으며 대답하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 그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윽고 나는 말했다.
"내가 조시를 속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속상하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우린 여전히 좋은 친구인가요?"
"넌 내 에이에프잖아. 그러니 좋은 친구겠지, 아냐?"

 

클라라가 조시를 기다리고, 선택받기를 소망하고, 어머니 앞에서 조시와 비슷하게 걸어보다가 결국 조시네 집으로 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특히 어머니가 클라라에게 조시처럼 걸어보라고 한 게 약간 이상했는데 그래도 클라라가 조시를 만나 다행이었다. 클라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왠지 내가 에이에프가 된 것처럼, 가구나 물건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물건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든 자기가 만들어진 목적에 맞게 조시와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시를 도우려 하는 클라라의 모습이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이고, 뭔가 짠했다ㅠ

2부부터는 클라라가 조시네 집에 가서 아픈 조시를 돌보고, 조시와 가족, 릭, 교류모임 친구들 간의 관계와 감정을 이해하고 클라라를 살리기 위해 태양에게 기도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이 세계는 '향상'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다. (향상은 로봇으로 따지면 업그레이드?) 조시에게 교류 모임을 강조하는 엄마의 말로 미뤄볼 때 아이들끼리 만나서 서로 어울리는 것도 따로 준비해야 할 정도다. 조시의 가장 친한 친구 릭은 '향상'되지 않은 아이이기에 모임에서 오히려 클라라와 같은 타자의 입장에 놓인다. '향상'된 아이들이 모임에서 클라라를 겁박하며 함부로 대하고, 릭은 은근히 무시하며 '친해지려고' 하는 장면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만약 진짜 그런 사회가 온다면 계층은 더 공고해지고 사람들은 거주지나 향상 여부, 등급(이 책에서 직업의 중요도와 재산 상태를 뭉뚱그려 말하는 것 같다)에 따라 강력하게 나뉠 것 같다.

능력에 따라 사람들이 '대체'되고, 사회활동까지 점수로 매기고, 등급으로 분류되는 걸 보면서 미래가 진짜 이렇다면 너무 답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 않나 싶다. 인간들은 점수 매겨서 구분하고 무리짓기를 좋아하니까.

포옹이 오래 이어지는데도 조시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 몸을 뗐을 때는 둘 사이의 벌어진 틈이 다시 메워져 있었다. 

 

포옹은 여기서 인간다움, 애정이나 위로, 연결을 나타내는 장치이다. 커피잔 아주머니와 코트 아저씨의 포옹이나 엄마와 조시의 포옹, 클라라와 조시의 마지막 포옹에서 나타나듯이.

다시 한번 책을 읽어보니 앞에 나왔던 레인코트 아저씨와 커피잔 아주머니의 포옹 장면, 거지 아저씨와 개가 해의 자양분을 받고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뒷부분 이야기의 결말에 힌트를 주는 복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라라의 눈에 보인 이 장면들은 인간의 감정과 사랑, 서로를 아끼고 그리는 관계를 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기분 좋은 감정은 햇빛처럼 따뜻하다. 생명을 먹여 살리는 태양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대체될 수 없는 인간다움이 있을까?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조시의 엄마가 클라라를 폭포에 데려가 조시처럼 해 보라고 하는 장면은 너무 기묘해서 싫었다. 꺼림직하고. 이 부분에서 엄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ㅋㅋ 게다가 가정부 클라라가 변태 개새끼라고 부르는 카팔디 씨의 집에서 초상화 작업을 한다니 뭔가 엄마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구나 생각했다. 클라라에게 카팔디를 똑바로 감시하라고, 아니면 분해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릴거라고 하는 멜라니아... 아주 매력적이다.

 

"좋아, 클라라. 조시가 없으니 네가 조시가 되어주면 좋겠어. 아주 잠깐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
"안녕, 엄마. 나 조시야."
"좋아. 더 해 봐. 어서."
어머니는 테이블 위로 몸을 더 숙였고 나는 상자 안에서 기쁨, 두려움, 슬픔, 웃음을 보았다. 

"클라라, 너한테 새 조시를 훈련하라는 게 아니야. 조시가 되라고 하는 거야. ... 그날이 오면,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네가 조시에 대한 모든 지식을 지닌 채로 저 위에 있는 조시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쟤가 정말 나에게 조시가 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말했다.
"네, 그럴 수 있어요.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조시 내면에 클라라가 계속 이어나갈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조시가 될 거고 나는 너를 평생 그 무엇보다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줘. 나를 위해서 조시를 계속 이어가 줘."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그걸 완전히 알아야 하지, 아니면 너는 절대로 조시가 될 수 없어." 아버지가 멈춘 버스를 돌아서 가려하자 뒤에 있던 차가 화난 듯 빵빵 거렸다. 
"말씀하신 마음이요," 내가 말했다. "그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에이에프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이 방들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차례로 신중하게 연구해서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도 옆길에서 끼어들려고 하는 차에 경적을 울렸다.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방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내가 카팔디를 미워하는 이유가, 마음 깊은 곳에 카팔디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 딸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현재 기술로 파악해 복사하고 전송할 수 없는 것은 없음을 과학이 확실하게 입증했다고.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내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함께 살았지만 모두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 그랬던 거라고. 카팔디는 그렇게 생각해. 나도 마음 한구석에는 카팔디가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 두려운 거야. ... 그래서 나는 카팔디 같은 사람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 하는 말이 내가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나한테서 빼앗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 말이 이해가 가니?"
"네. 폴 씨의 감정을 이해해요."

 

어머니와 클라라의 대화가 소름돋고 기괴했다면 아버지와 클라라의 대화는 인공지능 로봇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혼란과 기술과 과학으로 뭐든 가능한 세상에서 인간다움에 한 줄기 희망을 걸어보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클라라를 조시의 대체품으로 만들고 싶어하면서도 널 사랑하겠다는 말에서 하나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결국 조시(가 된 클라라)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폴의 말에 따르면 조시의 어머니 크리시는 '구식'이어서 결국 새 조시를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클라라는 아버지의 말을 통해 희망을 갖고 태양의 특별한 자양분을 빌어보는 쪽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고, 폴에게 공해 기계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묻는다.

 

5부는 조시를 살리기 위한 클라라의 여정, 6부는 조시와 클라라의 헤어짐을 다루고 있다. 클라라의 노력 덕분에 조시의 건강이 좋아지고, 인공이 아닌 '진짜' 친구들이 생기고 나서 클라라가 자연스레 다용도실에만 머물게 된 장면부터 쓸쓸함과 외로움이 느껴져 슬펐다. 물건을 쓰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았을 때 그 물건의 입장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자연히 버려진 입장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시는 나에게 오기 전에 최대한 크게 Y자 모양을 만들듯이 팔을 쫙 펼쳤다. 그러더니 나를 안고는 한참 동안 있었다. 몸을 떼었을 때 조시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슬픔도 조금 볼 수 있었다. 그때 조시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왔을 때는 네가 여기 없겠지. 넌 정말 최고였어, 클라라. 정말로."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나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조시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만약 그래야만 했다면 제가 조시를 계속 이어 갈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 훨씬 잘되었어요."
...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 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
"해가 저한테 아주 친절했어요. 처음부터 늘 친절했지만 조시와 같이 있을 때는 특별히 더 친절했어요. 매니저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해가 늘 너한테 친절했을 거라고 믿어, 클라라."

 

 조시를 대학에 보내고, 어머니의 말대로 '서서히 꺼져가는' 클라라. 야적장에서 클라라는 뒤죽박죽인 기억을 되새기다 매니저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깨달은 걸 털어놓는다. 클라라의 마지막 말은 클라라가 조시에게 진정으로 좋은 친구였음을 보여준다. 인공지능도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도. 하지만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진짜 사람처럼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다. 클라라의 결론에 따르면. 친절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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