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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by 곰곰곰곰 2026. 2. 6.

나의 한줄평: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가녀장의 아름다움

 

이슬아 작가의 소설이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읽었다. 지금까지의 글들에 비해 좀 더 날것이지만 나름대로 거칠고 도발적인 맛이 있었다. 왜 날것이냐 하면 곳곳에 나오는 욕이라던가, 입말들, 그동안의 이슬아 에세이나 인터뷰집에 비해 정제되지 않은 생활감이 드러나서 그렇다. 그렇지만 이건 이것대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글 같다.

 

전반적으로 슬아, 웅이, 복희 세 사람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이 중 주인공은 출판사를 운영하며 이 집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녀장 슬아이다. 왜 여자도 가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안해봤을까? 엄마가 아닌 소녀가 가장이 되어 끌어가는 이야기라 더 신선했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에게 할아버지가 가르친 것은 기존의 질서였다. 하지만 책 많이 읽고 똑똑한 슬아는 할아버지의 말에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서른이 된 슬아는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집을 사서 출판사를 세우고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모부를 고용해 사장이자 가장이 되었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복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없는 기질을 딸이 가졌다고 느낀다. 딸에게는 주인의식이 있다. 손님처럼 살지 않는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감당하기 위해 자기 몸을 엄격히 관리한다. 그건 시아버지의 훌륭한 점이기도 했다. 좋은 점만을 빼닮은 게 복희로선 신기하다. 인간은 세대가 거듭될 수록 훌륭해지는지도 모르겠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이들에겐 좋은 것만을 반복하려는 의지가 있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힘도 있다.

 

여류 작가가 되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답하는 슬아가 멋있다. 새 시대를 여는 이라면 이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하는 느낌. 그동안 가부장제는 여성착취로 권위를 유지하며 굴러왔다. 며느리가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면 가장들은 결정하고 말하고 밖에 나가 자기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질서가 뒤집히면 안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모부가 가녀장을 자연스럽게 모시고, 가녀장은 일을 하며 성공하는 그림이 소설 속에서 너무 당연해서 통쾌했다.

 

이 집안의 바깥양반은 슬아다. 슬아는 주로 집에서 글을 쓰지만 원고료 수입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바깥일도 열심히 병행해야 한다. 슬아의 대표적인 바깥일은 글쓰기 수업과 강연이다.

아느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그는 참 많은 말을 했다. 최고의 권력은 발화권력인 법. 집안에서 제일 많이 말하는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슬아는 어느새 말과 글이 본업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수다쟁이 가부장으로부터 조기교육을 받고 자란 가녀장이 말의 딜에마에 빠지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강연에 진심으로 임하는 슬아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분과모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망한 분과모임들... 개망한 분과모임들과... 적당히 망한 분과모임들... 장소가 갑자기 바뀌어서 시끄럽고 사람많은 스타벅스에서 모임하게 된 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되고 각자 이야기하는 거, 또는 자기 이야기 안하고 내가 강의하는 것처럼 혼자 떠들어대는 거, 또는 뻔한 이야기 늘어놓는 강사를 모셔서 시간 대충 때운 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죄송하네. 가장의 덕목은 책임감이고 본업을 끝장나게 잘 해냄으로써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건데... 한 수 배웠다.

 

"젊음이 흘러가고 있어."
주말 아침. 슬아가 아침밥을 먹다 말고 혼잣말을 한다. 눈빛엔 초점이 없다. 지난 며칠간의 과로로 퀭해진 얼굴이다. 맞은편에서 모발 뿌리 쪽에 염색약을 발라놓은 채 국을 들이켜던 복희가 시답잖다는 듯 대꾸한다.
"아직 정정하세요, 대표님."
쉰다섯 살의 복희는 흰머리를 가리기 위해 보름에 한 번씩 헤나 염색을 한다. 슬아와 찬희 남매를 낳고부터 흰머리가 우후죽순 자랐던 것이다. 아직 서른 살인 슬아의 머리칼은 칠흑 같고 풍서아다. 그런데도 뭔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일만 하다가 젊음이 흘러가고 있다고."

"어제 데려온 사람을 다시 데려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상대가 나타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해놓고 슬아는 설렘이 아닌 피로를 느낀다. 
"젊음은 괴로워...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거든."
복희가 묻는다.
"그게 행운이지, 왜 괴로워?"
정수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답한다.
"다 해봐야 할 것 같잖아. 안 누리면 손해인 것 같잖아."
"인생에서 손해 같은 건 없어."
정말 그런가, 하고 슬아는 생각한다.
"누굴 얼마나 만나봐야 진짜 충분하다고 느낄까."
복희는 그런 충분함 같은 건 영원히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의 앞날엔 아직도 무수한 데이트가 남아있을 테니까.

 

젊음을 고뇌하는 가녀장의 어깨가 무겁다. "아직 정정하다"고 대답하는 복희의 말이 웃겨서 빵 터졌다. 책을 읽다가 실제로 웃은 것도 오랜만인데 이 책은 유쾌해서 읽기가 좋았다. 젊음을 괴로워하는 부분에 왜 오래 시선이 멈췄을까. 내가 젊은 날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일까.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고민하는 슬아의 모습이 지난 나의 모습 같기도 하고 지금 나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쩌면 영원히 앞으로도 이렇게 고민할 것 같기도 해서 낯익다. 도운이가 많이 생각나기도 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더 어린 시절에 대해 후회 같은 건 없다. 더 문란하게 살아볼 걸,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볼 걸하는 아쉬움도 별로 없고. 어쩌면 내가 그 무수한 가능성에 너무 겁먹고 그런 가능성을 즐기기엔 생계에 눌려있어서 여유가 없었던 건지도. 할머니가 아프자 나타난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 결혼해 버렸으니 가치관과 자아정체성의 혼란이 길었으면 길었지 만남과 인연으로 괴로운 날들은 적었다. (물론 그 당시엔 아니었다. 나에게도 스쳐간 남자가 많았다고!) 젊음은 가능성이 많아서 좋고, 그래서 괴로운 거구나...

 

슬아는 개미처럼 글을 쓰면서도 된장을 담글 줄은 모른다. 복희는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그걸 하느니 차라리 된장을 담그겠다고 말할 것이다. 복희의 엄마 존자는 된장 담그기에 도가 텄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각자 다른 것에 취약한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존자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시청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딸이 들려준 글은 딸의 딸이 쓴 문장이었다. 존자 혼자서 푸념처럼 늘어놓던 과거가 삼대를 거쳐 슬아의 버전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존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슬아의 기억과 복희, 영희, 윤희, 병찬의 기억이 뒤섞인 편집본이었다. 존자는 이야기의 주인이 여럿임을 알게 되었다. 존자의 삶은 존자만의 이야기일 수 없었다.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김장을 하러 할머니 집에 들른 슬아네 가족들의 이야기 끝, 이 장의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따라쓰고 싶었다. 딸의 딸의 거쳐서 나의 삶이 이야기가 되는 기분은 어떤 걸까. 글을 모르지만 딸의 입으로 손녀가 쓴 내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슬아가 너무 부러워지고 복희와 존자도 너무부러웠다. 나도 할머니 이야기를 쓴 적 있지만 그건 나의 입장에서 쓴 할머니의 이야기였을뿐, 진짜 할머니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일부러 외면하려 한 적도 많았다. 듣기가 싫어서, 그게 내 아픈 부분 또한 건드려 왔으므로. 그런데 슬아는 누군가 흘려들을 법한 조모의 하소연을 책으로 기록했고 그걸로 생애를 썼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글이 주는 선물은 또 있다. 바로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것에 실패했지. 부엌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언제나 실패했지. 슬아는 자신이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고 느낀다. 
그러는 사이 복희는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는다. 소설은 복희의 눈코입을 통과하며 거의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다. 바로 이 사람을 독자로 만나기 위해 몇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듯이. 

 

이야기가 가지는 힘은 위대하다. 소설이 독자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견뎌 살아남았다는 문장이 좋았다. 혼자서도 활활 타오르는 사람은 없고, 성냥갑도 누가 불을 댕겨야 켜지듯 우리가 하는 노동도 그렇다. 바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면, 바로 이 순간을 맞기 위해 이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고 뿌듯하고 눈물이 날까. 

슬아가 복희의 노동을, 식사를 매끼 마련하고 밥을 차리고, 그것을 치우는 노동을 경시해왔다는 걸 깨닫는 부분이 뭉클하다. 누구나 사람 없이는 일할 수 없다. 우리는 좀 더 서로의 노동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어린 제자에게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고,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명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는 슬아는 멋있다. 각자 아름답게 사는 복희와 웅이의 모습도 멋있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다시 한번 읽고나니 내가 저자에게 품었던 감정을 요약할 수 있겠다. 그것은 질투이다. 내가 쉬운듯 쉽지 않게 놓아버렸던 꿈과 새로움에 대한 질투.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특별하게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살고 싶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리고 너무 쉬운듯 그걸 해낸 사람을 보는, 힘들여 거기까지 간 사람에 대한 존경.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계를 열어준 이슬아 작가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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