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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by 곰곰곰곰 2023. 1. 1.

★ 나의 한줄평: 인간과 인간의 교감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져 당황했다.

제목만 보고서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유쾌하고 발랄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문체부터가 옛스럽고 딱딱했다.

이 책은 신경과 의사 올리버 색스가 자신의 임상경험을 적은 연구서이다. 그리고 올리버가 만난 환자, 한명 한명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신경학에 그닥 관심이 있지는 않았던 터라 초반부는 고대 신화를 읽는듯한 느낌으로 후루룩 지나갔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환자를 환자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의 삶을 염려하는 올리버 색스의 따뜻함이 느껴졌고, 환자들이 가진 증상과 그들의 삶의 곡절을 통해 나를 비춰볼 수 있어 좋았다.

 

- 길 잃은 뱃사람: 내 기억이 어느 시점을 이후로 멈춰버린다면? 똑똑하고 재기넘치는 지미는 순간 속의 존재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1945년 이전에 멈춰있다.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어떤 삶(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는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먼 과거의 일에만 뿌리가 남은 사람이었다. 흄은 이렇게 말했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명상에서는 현재를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한다. 의문이 들었다. 지미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는 분명 현재를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몇 초 뒤의 일마저도 금세 잊어버린다. 그에게는 덧없는 감각뿐이다. 

 

나이가 들면 중풍이나 노쇠, 뇌 손상 등으로 그때까지의 생활 즉 고도의 정신 생활이 예상치 않게 빨리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는다 해도 자신이 인생을 살아왔고 자신의 등 뒤에 과거가 있다는 기억은 남으며,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인생을 살았다'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하고 때로 쓰디쓴 회한을 주기도 하지만,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이러한 의식조차 없어진다.

 

지미가 사는 현재는 엄밀히 말하면 현재가 아니다. 지미는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그의 현재는 증발해버리고, 미래도 상상할 수 없다. 곁에는 유령처럼 과거가 머물러 있을 뿐이다.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났던 나쁘고 슬픈 일조차도 내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기 전 어느 시점에 '그래도 잘 살았다'라는 의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할머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한 인간이 어떤 기능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과잉' 또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고양 상태란, 단순히 건강하고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불안하고 도를 지나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흥분한 환자는 통합과 억제를 잃은 상태, 어떤 종류의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성장과 생명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이다. 모든 항진 상태는 왜곡되어 묘한 방향으로 나아가 기괴한 이상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겉보기에는 건강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것은 과잉이 놓은 무시무시한 함정이다. 

 

- 정체성의 문제: 내가 제일 공감갔던 에피소드다. 윌리엄 톰슨은 끊임없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급성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린 뒤 치료를 받았지만 자아상실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공상하는 힘은 그 자체가 뛰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착란 상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다. 왜냐하면 환자는 매순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변세계를 문자 그대로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한 필요성, 아마도 그것이 톰슨 씨가 장광설 만들기에 필사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진실한 이야기 혹은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것이다.
그것은 코미디다. 그러나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여기에 한 인간이, 어떤 의미로 광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주변 세계는 하나하나 그 모습을 잃어가고 의미를 잃어가며 사라져간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필사적으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발밑에서 항상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무의미라는 심연, 그 혼돈 위에 '의미'라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해 모든 순간에 늘 '의미'를 남기고자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내가 나 자신으로는 무가치한 것 같아서,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항상 바깥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어찌보면 나는 톰슨 씨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불안했고, 불편했다. 때로는 나 자신으로 있었고, 때로는 꾸며낸 나를 적절히 섞어 대응했다. 행복하고 뿌듯한 기억들이 많지만 역시 축제가 지나가고 나면 허망하고 허무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실 내 삶이 공허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나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순간 다른 사람을 작가의 자리에, 감독의 자리에, 관객의 자리에 놓았다.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는 배우처럼 그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몸은 하나인데 1인 다역을 하려고 하니 괴리감이 있고 고통스러웠다.

이제 나는 안다. 누구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가진 내면의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을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쓸 때, 어떤 작가가 되느냐는 중요하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설정할 것인가, 영웅으로 설정할 것인가, 수사관이 될 것인가, 성녀가 될 것인가.

장르는 학원물과 로맨스, 범죄수사물과 드라마, 공포와 판타지를 넘나든다. 

 

톰슨 씨에게서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가슴이 찡했다. 

 

그가 즐거운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렇듯 그의 얼굴은 내내 긴장감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가 말해야 하는 실체 없는 이야기가 그의 구원이며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표면은 빛나는 무지개처럼 쉬지 않고 변하지만 그 밑에서는 끝 모를 환상과 섬망의 심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조용하게 침묵할 수만 있다면, 만일 그가 쉬지 않고 지껄이는 것을 멈출 수만 있다면, 만일 그가 환상이 빚은 기만적인 겉모습과 손을 끊을 수만 있다면, 그때 그의 내면에 현실이 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우리반 아이들도 떠오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날뛰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자신을 지어내면서도 불안해하는 아이들.

올리버는 침묵과 정적, 정체성의 압력이 소거된 자연 속에서 평온을 찾은 톰슨 씨를 보며 생각한다.

가식 없는 진실한 자신으로 있으려면 때때로 침묵에 빠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혼자 있는 외로운 순간이 진정한 나를 찾아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수도 없이 나를 찾아헤맨 시간이었다. 새해에 느낀다. 나는 그냥 나로 있을 때 행복하니까, 나를 위해 이야기를 쓰자고.

때로는 펜을 내려놓고 쉬어가자고.

 

- 쌍둥이 형제: 이 이야기를 읽고서는 환자의 삶에 도움이 되는 치료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직업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학생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쌍둥이 형제는 평균에 비해 우둔하고 서툴지만 숫자의 우주와 신비를 아는 신기한 사람들이다.

 

이 쌍둥이는 겉으로는 아주 고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친구들이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노력 없이도 그들은 숫자로 가득 찬 우주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기묘하고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이를 '병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부를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이젤 데니스는 이렇게 썼다.
단 하나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지도 어디를 보아도 보통 사람 이하인 결함투성이 소녀가 되었다. 이런 기묘한 치료법이나 고안해내다니, 도대체 우리는 무얼 하는 인간이란 말인가?

 

소수에 관한 쌍둥이 형제의 특출난 재능은 '두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 하에 중지되고 말았다. 사회성 결여와 불건전한 관계를 이유로 형제가 시설에 따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는 숫자로 교감했던 쌍둥이 형제와 스케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자폐증 소녀 나디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치료'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아마 우리는 환자를 위한다는 이유로 정작 그들 자신은 원하지 않는 연습과 훈련속에 많은 이들을 빠뜨려 놓을 것이다.

장애인, 노인, 어린이, 이민자 등 권리를 누리기 힘든 상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질문이다. 나와 다른 이의 입장에서 진짜 그 사람을 위한 행동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겠다.

 

 교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뒤처진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정제된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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