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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부. 꽃심을 지닌 땅

by 곰곰곰곰 2022. 2. 20.

★ 나의 한줄평: 

 

전주에 살면 '꽃심'이라는 말을 많이 본다.

한국문화의 꽃심, 전주. 이런 식으로 많이 쓰인다. 아마도 본향 같은 느낌이 아닐지. 

전주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니, 전주시에서는 꽃심을 꽃을 피워내는 힘,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여는 강인한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동, 풍류, 올곧음, 창신이 전주 사람들이 가진 정신. 그래서 꽃심은 전주정신을 뜻한다 한다. 

 

내가 생각하는 꽃심은 꽃이 피어날 때까지 밀어올리는 식물의 힘이나 에너지이다. 최명희 작가님이 어떤 생각으로 부제를 붙였는지 궁금해 이야기를 되짚어 가다보니 점점 짐작이 간다. 

 

4부에서는 죽기를 시도했던 강실이의 임신 사실이 종가에 알려지며 매안이 한바탕 뒤집힌다. 시대가 시대였겠지만.

왜 여자는 흰 옷처럼 티끌 하나라도 있으면 안됐는지, 왜 먼지 하나 묻었다고 그렇게 온몸을 다 버린 것처럼 취급했는지, 그럼에도 억울함을 풀 길 없이 그저 참고 살아야만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현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게 참혹하고 안타깝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거나 그냥 스스로 죽거나. 그런 선택지에 몰리는 여성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린 장엄하고도 세밀한 온갖 부덕, 여덕의 훈계와 항목들이 강실이의 머릿단에서 풀리며 검은 물살처럼 어깨를 덮는다. 
... 보이지 않는 운명의 홍두깨와 다듬잇돌 사이에 감기어 낀 강실이는, 호되기 내리치는 방망이를 온몸에 맞으며 비명도 피멍도 토하지 못하고 이 물가에 서서, ...

 

오류골댁은 효원의 도움을 받아 강실이를 대실의 절로 피양시키려 하지만 옹구네가 가만 있지 않는다. 강실이를 잡아채고 황아장수를 붙들어 납치한 옹구네는 투장으로 매를 맞은 춘복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본격적으로 안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옹구네의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태도에 치를 떠는 공배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재미있으면서도 울화통이 터진다. "나는 저이랑 몸 섞은 가시버시오." 들이미는 옹구네의 대사가 아주 킬포... 

 

강호는 만주에서 강태와 강모를 만나고 와 어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이는 곧 효원과 율촌댁에게도 알려진다. 또 그는 투장사건으로 몰매를 맞은 춘복이네과 당골네를 찾아 자신이 유학할 때 인력거를 끌며 모은 돈을 건넨다. 

 

처음부터 약속 같은 것으로 서로 계약하는 관계조차 아닌, 오직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한쪽은 나서부터 인력거를 타고 있고, 한쪽은 오직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인력거 채를 죽을 때까지 끌어야 되는 관계.
양반과 노비, 양반과 상민.
그 자신의 노력이나 자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숙명적으로 지워진 순분의 굴레 때문에 제가 태어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 동안, 금방 고꾸라져 뒤집히면서 죽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비탈길에 매달린 무산자들.
그러다가 기껏 욕심을 낸다는 것이, 인력거 채를 내동댕이치고서 나도 인력거 속으로 들어가 타고 앉겠다는 것이, 죽은 아비 뼈다귀를 파다가 남의 선산 산소 귀퉁이에 밀어 넣는 꾀밖에 못 내고.
"불경스럽구나."
드디어 이헌의가 낮은 소리로 강호를 막았다.
그렇지요, 불경. 바로 그 불경 때문에 인력거꾼은 쫓겨나고,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혹은 죽기도 합니다. 이미 가진 자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가 넘보는 것은 제도 속에서 반란이고, 혁명이고,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라고 몰아붙입니다.
누리는 자는 대를 물려 영원히 그 기득권을 누려야 되고, 착취당하는 자는 영원히 제 가죽과 뼈를 착취당해야만 순리라 하고요.
순리. 그러나 그 순리는 누구를 위한 순리일까요.
왜 그 순리는, 누구에게는 권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억압이 될까요. 그것이 참으로 진정한 순리라면 누구도 누구를 해치지 않으면서 공생하고 상생해야 할 터인데.

 

종가 어른들에게 노비들을 면천하자고 말하는 강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아무도 그를 문제라 여기지 않고, 순리라고 여기던 시대니까, 심지어 차별을 당하는 천민들 그들 자신조차도 더럽고 치사해도 억울한 게 그저 팔자려니 하고 삼키던 시대니까. 삶에 너무 깊게 뿌리내려 모두가 의심하지 않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때 이처럼 자신의 주관으로 판단해 옳은 길로 나아가려 하는 사람은 더 빛을 발하는 걸거다.

 

+ 성평등도, 최근 일어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도, 동물권도, 채식도...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옮겨와도 똑같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맥락들은 소설처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게 어렵다. 나는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강호의 생각에서 한 가지 배울 점은 특정한 존재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권리는 순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하철을 탈 수 있으면 장애인들도 그래야 한다. 남자가 숏컷을 할 수 있으면 여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면 동물도 그래야 한다. 나의 편리를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제약해야 한다면 그것은 순리가 아니라 악법, 악습이다.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남원은 찬규 같은 흉악무도한 반란자가 난 땅인즉, 오늘도 당장 남원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하라."
... "찬규는 살아서 저를 바꾸고 싶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죽어서 남원을 바꿔 버린 것이지. 참 엄청난 일이야."
강호는 찬규의 대가리와 춘복이의 몸뚱이 그리고 백단이와 만동이의 봉두난발이 서로 칡뿌리와 등넝쿨처럼, 피울음으로 또아리져 켜켜이 엉키는 것을 눈앞에 바로 보는 듯했다.
그렇게나 장하고 아름다운 남원의 위용과 넓은 품을 두고도, 어니 갈피 한 자락 그늘에다 그 하찮은 찬규 하나를 품어주지 못했던 용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토록 단호하게 몽둥이를 내리쳐 그 누구도 넘보거나 접근하지 못하게 서슬을 세우는 매안의 배타는 또.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세운 이상을 나는 꼭 실현해 내고 싶다. 비천하고 상스러운 하천의 폭동 보복이 두렵다거나 그 계급에 대한 기득권자의 측은지심 연민 때문이 아니라, 당당한 이상으로서,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세상을 이 땅에 나는 이룩하고 싶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사람 하나의 진정한 뜻과 올바른 마음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리라.)
제도와 관습이라는 허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빼앗아 박살하여 버린 횡포는, 마땅히 역사와 사회로부터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와 환경을 모든 인간 앞앞에 각자의 몫으로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것을 받은 자가 제 몫을 어떻게 쓰든지 간에. 

 

강호를 '혼불'의 최애인물로 등극하게 해준 대사.

 

"아플 때일수록 눈을 뜨고 있어야 해. 눈을 뜨면 내가 무얼 보는 것 아닌가? 해도 보고,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삼라만상, 산천초목, 들짐승, 날짐승 다 보잖는가? 그런데 눈을 뜨면 그 순간, 내가 무얼 보는 순간, 이번에는 또 그 온갖 것들이 거꾸로 내 눈 속으로 생생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야, 한세상이. 살어서. 생기운 펄펄 넘치게."
(누구시까아....)
"그러니 눈을 떠. 눈을 뜨고, 보아. 눈감고 있으면, 생기운은 못 들어오게 닫어 버리고 아픈 기운만 종횡무진 몸 속에서 치닫게 하는 것이니. 살려거든 꼭 눈을 떠. 알었지?"

 

투장했다고 억울하게 몰려 매안에 끌려가 덕석말이를 당하고 누운 춘복이에게 강호는 말한다. 눈을 뜨라고.

세상에 맞아 아프고 서럽겠지만 눈을 뜨고 일어나 한세상, 이 세상을 보라고. 그래야 살아날 수 있다고. 지지 말라고.

춘복이와 만동이, 백단이는 소설 속에서 모두 굴레를 거부해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다. 불합리한 순리를 거슬러 불경을 범한 탓에 죽음 직전까지 가 몸져누운 그들에게 강호는 진심을 전한다. 눈을 뜨고 일어나라 하며.

 

8권에서 특징적인 것은 마한, 가야, 백제, 후백제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역사가 아주 자세하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작가는 역사책을 서술하는 것처럼 세세하게 써내려간다. 특히 백제재건을 위해 애썼던 인물들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일종의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최명희 작가가 생각하는 꽃심이 드러나 있기에 공들여 썼으리라.

 

그것은 꽃심을 가진 죄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
그 꿈은 지배자에게, 근이 깊은 목의 가시와도 같아서, 기어이 뽑아 내버리고자 박해, 냉대, 소외의 갖은 방법을 다하게 했다. 
제 한 몸 일신의 부귀와 영화나 편안을 도모하고자 시정의 장돌뱅이들처럼 장날 잠시 모였다가, 이윽고 보다 강력한 조직이나 점령자가 나타났을 때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그쪽으로 투신하는 것이 정당하고도 아름다운 일이라면, 우리는 지금 조선이 망하여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가슴 짓이기어 슬퍼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저항과 투항.
저항한 것들의 운명과 투항한 것들의 영화. 

 

최명희가 말하는 꽃심은 꿈이다.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사람에서 사람을 거쳐 대대로 내려오는 혼. 꺾이고 쓰러져도 얼을 지키려는 자세.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 통곡의 슬픔. 결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지만 그것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굳건함.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소망을 서술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요, 삶의 전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망한 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부귀영화 대신 의로움을 택한 사람들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비굴하게 숙이고 굽혀 이득을 취할 바에야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바보 같고 실속 없다고 멸시당할지라도 모든 걸 걸고 꿈을 살아가는 사람들.

 

핏줄의 한을 딛고 세상을 뒤집어 보려는 춘복과 옹구, 투장으로 한풀이를 하려 했던 당골네, 철재의 미래를 생각하며 강실을 돕는 효원, 조상과 종가를 지키려는 기채, 혁명을 위해 떠난 강태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을 보태는 강호.

 

 한 해도 아니고, 두 해도 아니고, 석삼년 캄캄한 세월 동안을, 나무 토막들은 부글부글 괴어 끓는 도랑창 더러운 복판에서, 남모르게 홀로 삭고 썩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윽고 날이 차서 건져내면, 열에 아홉은 형체마저 찾지 못하게 참말로 썩어 버리지만, 그 중에 천행으로 겨우 한 개 건져낸 토막은, 다행히도 살아 있어 소중하게 보듬아 올린다. 
이제 이 나무는 종이같이 가벼우며, 돌보다 단단하고, 불속에 구워 낸 것처럼 변함없는 성질로, 천 년이 가도 만 년이 가도, 다시는 썩지 않을 몸을 이루어낸 것이다.
새로운 재질로 태어난 것이다.
썩어서 썩지 않는 그대.
결코 순탄치 않은 시대와 역사, 진부한 인습, 억울한 관념의 편벽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올히려 저마다 제 몸으로 깎은 화병 하나, 삶의 중심에서 빚어 낸다면, 그 몸에 어리는 무늬들은 이윽고 이 세상에 새로운 풍경을 이루어 드리울 것이니.
그러나 사실은, 더러운 시궁창 한복판에서 괴이 끓고 울부짖는 거멍굴 하천들을, 이 화병 속에서 그는 보고 있었다.

이 진저리나게 더러운 나무토막의 모세혈관 끄트머리 속속들이 들이박힌 시궁물 시궁내가 다 씻겨 내리도록.
그렇게 씻어서 투명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하지만 씻어도 씻기지 않은 시궁물 멍든 빛은, 아련히 그윽한 비취빛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거멍굴의 춘복이나 만동이 백단이는, 끝끝내 썩지 않고 버티어 살아 남을 나무토막들일까. 양반 선산에 투장을 하여 조상의 뼈를 몰래 옮기고, 반골의 뼈를 꼿꼿이 곧추세워 몸뚱이 맞는 저들이, 결국은 이 역사 앞에 온몸 드러내 저마다의 무늬로 새 경치를 아로새길 것인가.)
그 어떤 경치를.

 

거멍굴 춘복이, 당골네에 약값을 쥐어주고 돌아가는 길, 택주는 강호에게 화병을 내민다.

그리고 강호는 그 속에서 천한 그들, 더럽고 시궁내나는 그들의 무늬를 본다. 

한과 서러움, 억울함과 통곡으로 점철된 세상이 썩고 삭혀서 내는 무늬를.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 어떻게 쓰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 속에서,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말과 얼굴에서 이런 조각을 접할 때마다 그것은 고요히 와 마음에 놓인다. 그리고 무겁게 무겁게 나를 흔든다.

너, 그렇게 살고 싶니 하며. 대단한 역사를 쓸 것도 아니고, 길이 남을 변혁을 이끌 것도 아니니 내 한 몸 챙기며 살자는 속삭임을 가로막는 목소리. 

지금 나는 최명희가 '혼불'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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