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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부. 평토제

by 곰곰곰곰 2022. 2. 6.

★ 나의 한줄평: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2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매안 이씨 가문의 지주였던 청암부인의 죽음이다. 이 죽음으로 인해 땅속 나무뿌리처럼 또 다른 사건들이 얽혀 생겨나고 인물들의 심리와 거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청암할머니의 죽음과 장례를 두고 다양한 감정과 의견이 교차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매안 원뜸 사람들과 거멍굴, 고리배미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보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가며 애정과 존경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인물(청암할모니ㅠㅠ)이 마지막을 맞이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숨을 멈추고 상태가 위태로운 환자 곁에서 함께 밤을 새우는 것 같고, 엎드려 한바탕 곡을 하고서는 멍한 정신으로 상여를 따라 고비를 넘어가는듯한 느낌이 든다. 감정의 소용돌이, 위압적인 감정소모... 

 

'혼불'은 민속학 자료, 논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전통 풍습이나 관습, 의, 식, 주를 비롯한 관혼상제 예절의 절차와 방식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보다보면 내가 한국인이면서도 너무 몰랐구나 싶고, 작가가 묘사하는 물건이나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읽다가 가끔씩 구글링을 하기도 하는데 제대로 안 나오는 것들이 많아서 서운하다. 

또 만약 내가 지금 살아가는 현대를 묘사한다면 작가님처럼 눈앞에 그려지듯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만하게 적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쏟았는지가 느껴지고, 그래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도 자연스레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애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 방금 관혼상제를 적으며 든 생각. 작가가 한국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겠다. 1부는 강모와 효원의 혼례로 시작, 2부는 상례가 주로 등장한다. 3부는 제례. 남은 것은 관례인가...? 4, 5부에 효원의 아들인 철재가 자라나 성인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면 관례까지 모두 다루게 된다. 설마 작가님의 큰그림....!! 소름.... 압도적 경이...!! 작가님은 천재인가... 아니, 천재님은 작가...!! 

 

2부에서 3부까지 거멍굴과 고리배미라는 배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내 최애는 옹구네다. 옹구네는 항상 할말 못할말 안 가리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며가며 타박도 많이 듣고 여러 사람한테 눈치없고 밉살스럽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속에 있지만 차마 체면 생각해 하지 못하는 언행을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밉지만은 않은 매력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자주 나오고 기억에 남는다.

또 기억나는 것은 무당 당골네 백단이 부부, 야심캐 춘복, 공배네, 평순네, 주막의 비오리, 백정네, 매안 이씨 가문의 하인들 우례, 효원의 교전비 콩심이 (이름 너무 귀여움), 믿음직한 안서방과 안서방네... 

이들의 삶과 속사정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고 신나고, 저마다 기구하고 다변다양한 사연이 있어 때로는 안타깝고 마음이 녹아들기도 한다. 

 

그때는 쪼들리고 시달리면서도 변함 없는 세월이 찾아와 주는 것을 믿었고, 세월 또한 어김없이 되돌아와 주었다. 농사꾼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늘을 믿었고 땅을 믿었다. 하늘은 절기가 되면 비를 내려 주고 뙤약볕에 곡식을 여물게 해 주었으며, 때가 차면 익어 넘치도록 지열을 다스리고 거기다가 거두어 들이기 알맞게 날씨마저 부조해 주었다. 
그뿐이랴. 땅은 하늘의 음덕을 거스리지 않았다. 한번 떨어진 싹은 두말없이 품고 있다가 욕심 없이 지표로 토해 냈고, 묵묵히 자신의 젖을 먹여 살지게 길러 주었다. 거둔 뒤에 누구의 것으로 몫 지어지든지 아무 상관 없이 탐스럽게 알곡을 채워 주는 땅은, 곡식과 식물과 산과 강의 어미였다.
땅에 떨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썩는다.
땅이 무엇을 거부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썩혀서 비로소 다른 생명으로 물오르게 한다. 
그래서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을 사람들은 '돌아간다'라고 하는 것인이도 모른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하고 두말 없는 땅에다 한세상을 의탁하고 사는 농사꾼의 성정은 그대로 땅을 닯게 마련이었다.
(이제는 끝났다.)
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막바지의 비탈이나 낭떠러지에 강파르게 서서 걸판을 낼 일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미우나 고우나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고, 죽어서도 자식들은 남아서 그놈들끼리 또 마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미 샅샅이 뒤져가 버린 공출의 뒤에다가 콩나물을 기를 콩마저도 남아 있지 않아, 요기가 될 만한 나무 뿌리를 삶은 물로 끼니를 때우는 거멍굴 사람들은 가까스로 가을을 넘기고 겨울에 들면서 까닭없이 뒤숭숭했다.

 

2부 3권의 시작, '암운'은 이미 땅에 들어가 묻히고 썩힐 청암부인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 (첫 번째 암운.) 위 부분 다음에는 까닭없이 뒤숭숭한 거멍굴에서 옹구네와 춘복이 하는 대화가 등장한다. 옹구네가 질투하며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는 춘복이 안에 잠들어있던 욕망을 툭 건드리고 마는데 이는 뒤에 커다란 폭풍 바람이 되어 몰려온다. (이것이 두 번째 암운이다.) 그리고 논을 빌려줬다가 돈을 못 받고 굶는 바람에 자식을 죽인 쇠여울네는 이기채의 종가로 쳐들어와 낫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오열을 한다. 자식 잃은 슬픔에 눈이 뒤집혀 양반가로 쳐들어 온 쇠여울네는 춘복의 장작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다. 그러다 몰매를 맞고 통곡을 하며 쫓겨나는데 참 운명이 무엇인가 싶고 참담하고 슬펐다. 또 이씨 가문의 지위와 권세도 슬슬 금이 가고,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인상 깊었다. (세 번째 암운이다.) 

 

"그러먼? 그러머언. 원뜸에 강실이가 자개 차지 될 중 알었당가? 거그는 대체나 더 좋겄네? 양반 중에 양반잉게. 맵씨 좋고 태깔 좋아 향내가 난당가 냄새가 난당가, 남원골에 쩌르릉 허는 양반의 따님인디, 거그다가 몸뗑이도 헌 것 되야 부렀겄다. ..."
(..... 강실이 .....?)
아까 옹구네가 내쏘던 말이 그대로 춘복이 가슴 복판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뚫린 복판에 꽂힌 이름은 곧 화살이었다.
(내가 이날을 이때끄장 지달렀능게비다. 그럴라고 이 거멍굴에 엎어져서 살었능게비다. 나는 죽어도 상놈 자식은 낳기 싫었응게. 이 육시랄 노무 상놈 꺼죽 훨훨 벗어 내부리고, 사램이 사는 것맹이로 살고 자펐다.)

 

"내가 눈 뜨고는 안 당헌다. 그거이 어뜬 논이라고. 나락 모가지 시퍼렇게 섰을 때 산 것을, 이때까지도 돈을 안 준단 말이냐? 천지에 백설이 날리고, 냉돌방에서 자식 새끼가 얼어 죽었는디도, 이 에미가 눈 버언히 뜨고 그것을 쥑였다. 내 눈앞으서 그 에린 거이 배고프고 추워서 죽었다고오. 네 이놈, 너는 니 자식을 잘 멕일라고, 넘으 자식은 얼어 죽고 굶어 죽어도 좋단 말이냐.
그께잇 노무 논밭 뙈기, 느그집 행랑살이만도 못헌 거이다마는, 그것을.... 어치께 일군 거이라고... 황소 공출해 가고는, 내가.... 내 모가지에다가... 이, 내 모가지에다가 쟁기 걸고.... 가래질했던 논이다아... 그 논바닥에 내 눈물로 거름을 줌서 이날끄정 목심같이 여겨왔든 논이라고오.... 시상에도 웬수엣녀르 가뭄 땀새, 딸자석 하나 있능 거 보리쌀에 팔어 먹게 생겠길래, 딸을 팔어 먹느니 논을 팔자, 허고, 내가, 자식을 파는 심정으로 팔었든 논이다, 그 논이...." 

 

이 장면 뒤에서 강모와 강태는 술집에 앉아 신분과 계급, 착취와 혁명을 논하며 대립한다. 강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인물로 청암부인의 부르주아적 행태를 날서게 비판하고, 강모는 혁명을 해서 찬란한 뜻을 이뤄보라며, 그러나 그 끝은 민중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또다른 착취의 악순환일 것이라고 대꾸한다. 그리고 슬프게 일갈한다. "그래서, 존재는 끝없는 갈등이올시다." 강모는 오유끼와 사는 집에 돌아와 오유끼를 때린다. (효원을, 강실이를, 청암부인을 때린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마련해 들여놓은 세간을 보면서 그를 괴롭히는 뭇 사람들의 핏줄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한편 청암부인도 고된 육신과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떠난다. 망자와 마음을 나눴던 인월댁이 지붕위에 올라가 돌아오라며 혼백을 부르는 장면, 청암부인의 얼굴을 노근에 비유해 묘사한 장면이 인상깊었다. 가족친지들이 모여 의미와 정성을 담아 관이며 수의, 상여를 마련하고, 염을 하며 장례를 치르는 부분도 대단했다. 실제 장례식을 치르는 기분.

청암부인이 육신을 벗고 떠나는 동안 자신의 씨앗, 조상의 근본이 숨쉬는 땅을 버리고 만리타향으로 떠나가는 강모의 모습이 대비되기도 한다. 근본도 모르고, 조상도 성씨도 없는 거멍굴, 고리배미 이야기로 3권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노근은 지상으로 솟아오른 뿌리이다. 제 뿌리를 뻗고 있는 산의 지질이 비옥하여 흙이 두터운 곳에 사는 나무는 그럴 리가 없지마는, 천인단애 까마득한 낭떠러지나 만중철벽 척박한 땅에 서서, 그 뿌리가 암석의 틈바구니에 끼이고, 흙을 깎는 물살에 씻기어 제 둥치를 지탱하기 어려운 나무는, 처절한 젊은 날을 보내고 노목이 되면, 이제 그 뿌리의 뼈가 땅 위로 울툭불툭 불거져 드러나니.
그 모습은 모질고 끈덕진 세월을 다 육탈하고, 세상을 벗어 버린 초연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어머님의 한 세상이 이에서 무엇이 다르리오.

 

2부 4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박모'. 우리말로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한 상태, 땅거미를 뜻한다. 땅거미를 검색해봤더니 "땅+검(다)+이"가 합쳐 연음화되어 땅거미가 되었다고 한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날이 저문다.
그렇지 않아도 진종일 낮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하늘은, 구름이 가린 볕뉘마저 스러지는 저녁이 되면서, 그 젖은 갈피에 어스름을 머금어 스산하게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마치 아득히 펼쳐진 전이의 회색 창호지 같았다. 아니면 담묵을 먹인 거대한 화선지라고나 할까.
검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동짓달의 빈 천공에, 노적봉은 메마른 갈필로 끊어질 듯 허옇게 목메이며 스치어 간 비백의 능선을 긋고 있었다.
이 능선 너무 아슴한 곳으로 드리워진 한지의 하늘 끝자락은 수묵의 연지에 닿아있어, 거기 저절로 스며든 어둠이 서서히 그림자 누이며 번져 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다. 쓰여있는 풍경이 넘실넘실 살아나 마음에 퍼지며 젖어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곧 마당에 서 있는 오류골댁 강실이로 이어진다. 

 

집을 두고 한데서 잠을 자는 새는 없다. 그리고 제 집을 잘못 찾아드는 새도 또한 없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이 새들이 어찌 날이 저문다고 이렇게 저의 둥우리로 돌아갈 줄을 안단 말인가. 아무리 멀리 날아가 있다가라도. 
그것은 어쩌면 나무들이 목 놓아 부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어둠을 빨아들이는 것은 곳 간절하게 새들을 부르는 소리여서, 저녁 새는, 나무가 어둠을 빨아당기는 그 흡인의 기류에 실려 둥우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나무는 새들을 찾아 나설 수가 없다. 오직 저 혼자, 새를 부르며, 선 자리에 선 채로 목 놓아 어둠이 깊어지는 수밖에는.
그렇게 나무가 어두워져야 새들은 돌아온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는지도 모르는 새가 까칠하게 비운 둥우리를 안고, 그저 새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 나무가
"돌아오라."
기다림이 목메인 둥우리로 새들을 부를 수 있는 목소리는 오직 어둠뿐이다.
그리하여 전신에 차오른 어둠이 한밤중의 고비에 이러르 묵광으로 검게 빛날 때, 그 깊은 어둠으로만, 나무는 새들의 거친 날개를 순하게 잠재워 제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새가 내일은 다시 날아간다 할지라도.

 

강실이는 그렇게 나무가 새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강모의 혼례날과 오류골댁이 지어준 고운 설빔 연노랑 저고리를 그린다. 살을 에는 바람에 실려오는 만수향내를 어찔하게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강모와 서러워 죽은 강수의 명혼을 그리며, 슬픔의 물살을 맞는 모습이다.

 

 한번 날아간 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빈 둥우리가 재와 같이 삭아 버리는 나무의 가슴패기나, 한번 떠나간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를 기다리던 집터는 무너지고 황폐한 마당에 우북한 쑥대만 바람에 씻기는 땅이 서럽다면. 사람의 마음도 나무나 땅일 수 있을진대, 그 마음이 서 있는 나무나, 기다리는 땅에, 새와 사람이 되는 이는 또 누구인가.
결국 오지 않는 강모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아흐레 만에 청암부인의 출상을 하던 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망인의 죽음을 빌려 사실은 그 자신이 살고 싶은 그 무슨 염원과 소망의 치장을 저렇게, 색깔로, 모양으로, 무늬로 간절하게 꾸미는 것은 아닐까.
참으로 고운 색깔들이 떠나가는구나.
저 휘황하고 아름다운 색색 가지 색깔들이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저렇게 가는구나.
강실이는 저의 한세상에서 저렇게 고운 색깔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어, 오래오래 그 상여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한 생애를 다한 색깔들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듯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혼백, 불러도 듣지 못하는 혼백을 배웅하며 점점 마음을 잃어가는 강실이의 모습과 쓸쓸하고 어두컴컴한 저녁의 땅거미가 잘 어우러져 슬픔을 자아낸다. 명 문장이다, 정말.

 

2부 마지막 즈음, 이헌의가 상례의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도 참 인상깊었다. 

초상의 예란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려도 그 사람이 생전에 가진 마음, 하던 일을 전부 추리고, 고인의 정신을 수습하여 우주의 순환 속으로 잘 보내드리는 것. 그런 의미를 모르고 시신을 그냥 싸서 내버리는 일이라고 여기면 그 어렵고 세세한 절차가 모두 허례허식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부모, 조상이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고 여기는 마음, 또 고인의 생을 잘 갈무리해 보내드리려는 마음, 고인의 밝고 환한 정신과 기운(원기)을 기억하고 자신 안에 잘 간직하여 그렇게 살고자 하는 뜻이 담긴 예식인 것이다.

 

보통 전통 예절이나 예식을 떠올리면 '귀찮다. 복잡하다. 어렵다. 체면치레다.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헌의의 충고를 읽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많고 어렵고 복잡한 절차에 그만큼 정성과 뜻과 마음을 담아 존중하고 사랑하는 정신으로 행하니, 조상들은 그것이 귀찮고 괴로운 행사가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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