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한 챕터.
평생 동안 품고 갈 질문을 던지게끔 아이들을 교육하라는 말이 인상깊다. 답을 쉽게 알 수 있는 질문이면 안된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의문을 안고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므로.
또 그런 질문은 자아보다 더 커다란 무언가에 연결되도록 학생들을 안내한다.
좋은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과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줄 "저기 바깥의" 무엇을 향해 내적인 소망을 갖도록 세심하게 이끌어간다. 종교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우리는 미리 정해진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내면 탐구를 수행하도록 여러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침과 자원들을 제공해야 한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인내하라. 질문 그 자체를 사랑하라. ... 답을 구하지 말라. 그것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핵심은 모든 것을 살아가는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학생들이 내면탐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고 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인 삶에 대한 질문은 통상적 의미에서의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 자신의 삶 한가운데 충실하게 붙들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배우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자아보다 커다란 실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그리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과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과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결정적인 선택을 성찰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그 과목에 담겨있는 "큰 이야기"를 학생의 삶에 있는 "작은 이야기"와 분명하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잔인함과 창의성의 역사, 환경 파괴와 복원, 절망과 희망의 문학 등 모든 분야의 사실이 긴장을 유발하는 질문들을 제기한다는 것을 학생들은 배운다. 그 긴장을 끌어안음으로써 그들은 더 훌륭한 시만과 사람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른들이 구성한 사소한 문제 이외의 사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 듯 대우받고, "성취"의 책임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다. 그렇게 해놓고 우리는 그들이 18세가 되는 순간 참여 민주주의에서 충실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으로 변신하기를 기대한다.
과목의 큰이야기를 학생들 삶의 작은 이야기와 연결시켜야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런 연결을 유발할 계기를 마련하고, 질문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큰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알려주고 공유하고 논의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지금 위의 구절을 다시 읽으니 학생들의 삶에도 더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들의 삶을 모르면 어떻게 배움과 연결지을 수 있겠는가?
또하나는 학생들을 안전한 비닐하우스에 넣어놓는 것과 같은 지금의 환경이다. 학교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조금더 실제적인 모험과 탐구의 장이 되어야 하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보호하고 과하게 무시한다. 적어도 함께할 때 생기는 갈등에서만큼은 아이들이 물러서지 않길 바란다.
감춰진 커리큘럼이라는 개념은 단순하고 자명하다. 그리고 흔히 무시된다. 학생들은 배우는 무엇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도 학습한다. 학생들은 충실한 정보로 가득 찬 민주적 가치에 관한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교사가 그 정보를 받아쓰게 하고 학생들이 그것을 달달 외워 시험에 적도록 한다면, 그들은 민주적인 가치를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그들은 독재의 추종자로 살아남는 것을 배우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믿는 것에 상관없이 정당의 강령을 읊조리는 것 말이다.
교실 안에 있는 관계의 역동이 주는 영향은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위해 암기한 정보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너무 많은 학생이 교실에서 교사의 퍼포먼스에 대한 단순한 관객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탐구와 발견과 상호 창조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가하기 보다는 전문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시민을 키워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뒤로 물러앉아 프로가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람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어쩌면 그들을 내 퍼포먼스의 관객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대단한 공연도 하루종일 앉아 박수만 쳐야 한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교사가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가르친다해도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주체성이 배제된다면 그 시간은 낭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합의로 의사결정을 할 때 이것 아니면 저것을 어설프게 선택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 갈등이 더 커다란 종합적인 지점으로 우리를 열어줄 때까지 긴장을 붙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다. 애당초 생각지도 못했던 훌륭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족하는 승자와 언짢은 패자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대신 공동체 의식이 깊어질 수 있다.
낯선 사람 그리고 낯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되는 성가시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신비에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실재가 '신'이든 '이성'이든, 그것을 길들여 편안한 지대의 경계 안에 묶어두고 싶어한다. 두려움이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궁극성'은 훼손 당하고, 우리 삶의 범위는 좁아지며,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핵심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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