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간편하게 판단할수록 복잡한 깊이를 놓친다.
김슬기 추천으로 읽게 된 책. 당연하게 생각했던 평가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어서 인상 깊었다.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판단한다. 주말에 먹었던 음식의 맛을, 전시회에서 본 그림을, 친구와 애인의 성격, 아이들의 성적을, 자신의 성과를.
그런데 삶의 필수적인 부분을 잘못된 잣대로 판단하고 있다면? 우리가 중요한 것은 놓치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면?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닭의 벼슬만 만지고 나서 코끼리를 다 알고, 닭을 다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면?
내가 평균이라는 이런 측정 방식이 거의 언제나 틀리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책의 주요 전제는 언뜻 보기엔 단순하다. 즉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같은 것도 없다. 평균적 학생이나 평균적 직원도 없고 그 점에서라면 평균적 두뇌 역시 없다. 이러한 일상화된 개념들 모두는 잘못된 과학적 상상이 빚어낸 허상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조종사나 한 사람의 배관공이나 한 사람의 의사가 필요한 순간이나, 이 아이를 가르쳐야 하거나 저 종업원을 채용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다시 말해 어떤 개개인과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면 평균은 쓸모가 없다. 평균이 사실상 한 개인의 가장 중요한 면모를 알아보지 못하게 속일 경우엔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자였던 케틀레는 천체의 회전 속도를 재는 데 정확한 측정값을 얻기 위해 평균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런 평균법을 인간에게도 적용하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의 가슴둘레를 재는 데서 시작해, 평균 키, 평균 체중, 평균 얼굴빛 등 인간의 특성에 대해 닥치는대로 평균을 냈다. 그리고 '개개인이 오류에 해당하고 평균적 인간이 참 인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평균적 인간' 개념이 생기고 나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룹화하고, 그룹의 특성을 통해 구성원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한편 골턴은 케틀레의 평균적 인간을 신봉하며 더 나아가 '평균을 최대한 향상시키려 힘쓰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는 인간을 저능층, 평범층, 우월층까지 1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를 거치자 평균은 정상의 개념에서 평범함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비약을 통해 우월층이면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케틀레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도 평균이 정상을 판단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라고 믿게 됐다. 특히 신체 건강, 정신 건강, 성격, 경제적 지위와 관련해서 유독 그런 믿음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과라는 편협한 기준에 다른 개개인의 계층이 개개인의 재능을 판단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믿음도 갖게 됐다.
테일러는 1890년대부터 평균 방법이 오류를 최소화해준다는 가정과 같은 방식으로 비효율성을 최소화해줄 새로운 산업 조직의 비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비전이란 바로 표준화였다.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손다이크는 프랜시스 골턴의 개념을 열렬히 옹호하며 그를 "아주 공정하고 과학적인 인물"이라고 떠받들었다. 손다이크에게는 학교의 목표가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 수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었다.
또한 "평등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우등생을 가려내 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붓는 것이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테일러는 평균 방법을 기업과 학교에 도입했다. 개개인의 신화는 깨졌다. 사람들은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평균적인 방법으로 평균적인 시간만큼 일하고 공부하면 된다. 1924년 미국 언론인 헨리 루이스 멩켄은 공교육의 목표를 "가능한 많은 개개인들을 똑같은 안전 수준으로 강등시키고 표준화된 시민을 길러내고 훈련시키며 반대의견과 독창성을 억누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손다이크는 학교의 학생들을 계급화하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부분에서 뛰어난 '우등생'은 다른 분야에서도 모두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학생들을 최대한 빨리 분류해 그들에게 적절한 조취를 취하는 것이었고, 우등생에게는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열등생에게는 '가능한 한 신속히 자원투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댓가를 치르게 했다. '노르마' 닮은 꼴 찾기 대회가 그러했듯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수많은 평균에 비교해 평가하도록 조장하며, 아니 강요하며 우리에게 그 정당성을 끝도 없이 제시하고 있다.
나 또한 평균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
내가 '우수한' 교사가 되려면 아이들을 평균적인 진도에 맞게, 평균적인 수준만큼 끌어올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평균보다 못한 아이들의 점수를 어떻게든 높여야 한다. 평균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미달'만은 피해야 한다. 예전에는 열등한 아이들에게는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지만 요즘은 다르다.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 평균에는 도달해야 하니까 목표에 미도달한 아이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붓어야 한다. 부진아는 아마 모든 선생님들의 골칫거리일 것이다.
아이들 교육뿐만 아니라 내 삶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같은 걸로는 부족하다. 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 골턴의 주장처럼 요즘시대에 평균은 정상이 아니라 '평범이나 보통'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속한 집단의 평균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어린 시절, 받아쓰기 점수나 구구단 암기에서 시작된 평가항목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더더 늘어난다. 입시, 취업,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육아와 같은 인생의 과업(이라고 여겨지는 항목들)에서, 가정과 학교, 직장, 심지어 여행지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평균에 해당하는지, 그보다 못한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하나라도 뒤처지거나 떨어지면 그것을 실패로 단정짓고 낙담한다.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최소 몇 명하고는 연애를 해야 하고, 다들 자녀를 2명씩은 두고 있으니 나도 거기에 따르고, 결혼 적령기에 늦지 않게 적당한 사람을 찾아 결혼하고, 지위에 어울리는 집과 차를 사고... 끝없이 비교하면서 성적이나 업무 성과뿐만 아니라 감정과 경험까지 평균에 맞추려고 한다.
남들에 비해 부모님 용돈이 너무 적나, 너무 많이 일하거나 너무 많이 쉬고 있나, 여기서 화내는 게 맞나,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옷이나 머리에 돈을 덜 쓰는 게 맞나, 누구는 이 나이에 벌써 몇 명을 만났는데 나는 모자란 건가, 다들 이때쯤에는 결혼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무 늦었나... 그런 신화를 맹신하며 달려나가는 인생은 얼마나 숨차고 고달픈지, 내가 선택한 것이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실수해서는 안된다.
일부를 가지고 개개인의 능력과 재능, 성격, 특징을 모두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도 강하다. 국어를 못하면 수학도 못할 거고, 당연히 사회성도 낮을 거고, 나아가서 가정환경도, 장래도..... 그런 믿음이 계속 강화된다. 그리고 믿음은 다른 신화를 부채질한다. 내가 하나에서 실패하면 다른 것에서도 실패할 거야, 그러니 절대로 평균보다 떨어지면 안돼, 모든 면에서 평균 이상이어야 해. 여기서 1등해봤자 소용 없어, 여기 평균이 다른 학교 평균보다 더 낮으니까. 끝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당연한 것에 질문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보통과 정상, 평범한 삶과 평균적인 사람에 대한 신화는 맹목적이고 또 견고하다. 그것이 사회를 잘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맥락과 섬세한 취향을 소거하고 묵살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안대를 벗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평균의 함정에서 기어나와 개개인성을 찾아나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