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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2

by 곰곰곰곰 2021. 7. 18.

햇빛 속에 비가 내린다. 땀이 배어나와 옷이 축축해지지만 창문을 열어놓고 조금씩 번지는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한강의 책은 햇빛과 함께 쏟아지는 비 같다. 어쩐지 이상하고 우울하고 환하고 상쾌하다.

 

- 어둠의 사육제: 아무 데도 들어갈 수 없는 여자와 어디에건 들어갈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

'나'는 혼자 상경한 야무지고 야망있는 처녀다. 공장에서 일을 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대학에 가서 번역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연탄가스를 마시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친해진 룸메이트 인숙 언니가 전세금을 빼 달아나 버린다. 나는 결국 유일하게 서울에 사는 친척 이모네를 찾아가 그 집 베란다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자 명환으로부터 자신의 아파트를 가져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 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지하철 창문에 비친 객실의 음산한 풍경 속에 내 얼굴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 가면 같은 얼굴을 뒤집어쓴 사람이 더 이상 눈물 따위를 흘릴 수 없다는 것을 때닫고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우연히 만난 인숙언니의 얼굴이 그랬듯이 내 뺨은 흉하게 꺼져 들어갔고, 바싹 여윈 목줄기는 무수한 푸른 실정맥들을 비쳐 보이고 있었다.

세상 속에 있을 때에 나는 외로웠고 세상에서 돌아와 서면 더욱 그러했다. 
이상한 일은, 밤 불빛 위로 일렁이는 인숙언니의 얼굴이 그녀 특유의 독기 어린 인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있던 주인공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그와 똑같은 얼굴이 되어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우리는 그림자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강렬한 햇빛을 받을수록 반대편의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그리곤 어느샌가 미움과 원망으로 씹어댔던 얼굴을 닮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삶의 공간이라 할 수 없는 친척집의 베란다에서 불빛들을 바라보며 도시 안에서 빛을 내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우연히 꺼내든 영문판 시집의 한 구절처럼 음지에서 피는 꽃이 되어간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데 그 위안의 손짓 같은 찬란한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인숙언니의 야윈 얼굴이 그 야경 위로 하루하루 아련하게 시들어가는 동안, 내 앙가슴에 맺혔던 피멍울도 어니 사이엔가 함께 풀리어 갔다. 멍울이 맺혀 있던 그 자리에 모호한 미련들이 뒤이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그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저 방에서, 저 불빛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오?"
"저 수많은 불 켜진 창들 속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다는 생각, 그런거요?"
"나는 그 반대요. 밤늦게까지 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오."
"아무튼 분명한 것은 말이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

 

한강은 여기에서 주인공을 통해 삶이라는 미련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추잡스러우며, 구질구질하고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어져야만 하는 어떤 것이란 걸. 그러니까 우리 앞에 어떤 절망이 와도, 불행이 와도, 그런 넌덜머리나는 미련을 잡고 살아보라고 말하고 있다. 희망이 미련하게 보이고, 꿈이 위안이 되지 않더라도.

 

베란다의 창살 앞에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몸뚱이를 기대어 서면, 저 불빛들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을, 무엇인가를 꿈꿀 것을, 무엇인가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것을 나에게 강요하곤 했다.
이제 그것들은 나에게 위안이 아니었다. 절망보다도 넌덜머리 나는 미련이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 가슴마다 무작정 들러붙어 꿈틀거리는 미련, 흡사 피를 빨아먹는 환형동물 같은 그것을 어떻게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불을 켜세요!"
".......불을 켜면 되잖아요,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텔레비전을 켜세요, ...... 이곳이, 이곳이 싫으면 다른 데로 가면 되잖아요, ...... 이 빌어먹을 서울이 싫으면 떠나버리면 되잖아요, 그만한 돈을 가졌으면 어디서 뭘 해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말한다. 불을 켜지 않고, 컴컴한 어둠 속에, 온통 빈 어둠 속에서 홀로 우는 명환에게, 불을 켜라고.

어둠 속에 있지말고 모든 걸 포기하지 말고, 아직 남은 날들을 버리지 말고 불을 켜라고.

 

그것은 앞으로 좋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거나, 고통을 잊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류의 긍정은 아니다.

변해버린 얼굴이 두렵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외롭고, 적당히 살아남을만큼 찌들었어도, 그래도 살아보라는 부탁이다.

 

오늘은 햇빛 속에 비가 내리는 이상스러운 날이다. 어떤 말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날도 있다.

그래도 밤이 되면 불이 켜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고, 먹고, 사랑하고, 배신하며 숨을 쉰다. 희망이 꺾여도, 절망이 덮쳐도 그냥 그렇게 미련스럽게 끈질기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살아간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그러고도 삶은 이어진다.

 

 

* 그리고 좋아서 뽑은 문장들

- 야간열차

 

나는 시계탑 앞에 서서 기다렸다. 내가 놓쳐온 모든 것을 기다리듯이 나는 기다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고 다만 경멸하며 흘려버린 젊음을 기다리듯이 묵묵히 기다렸다. 기다림만이 나를 속죄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나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며 빗발 속에서 춤추는 인가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질주: 상처난 손바닥 같은 인생. 맞아죽은 동생 진규를 기억하는 형 인규는 그 억울한 죽음 이후로 비정한 인간이 되어간다. 그가 달리는 이유를 그렇게 질주할때만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숨이 차도록 달리면 덫과 같은 인생, 덫과 같은 육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명환도 그렇고, 전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그래서 인규는 죽기 위해 숨차게 살아간다. 고통을 겪었든 아니든 어차피 죽음은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옥 같은 슬픔 속에서도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덫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고 인규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진규가 자신의 인생의 덫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새벽을 만날 것이 아닌가? 인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 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가등이 거진 도로변을 걸으며 인규는 "걷다 보면 끝난다, 걷다 보면 이 길은 끝난다"라고 소리 내어 중얼거려보곤 했었다.

이십층가량 되어 보이는 병동에는 층마다 한두 군데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방에서는 환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앓는 사람들의 방은 어두웠다. 마치 하나하나의 창이 지쳐 눈을 감은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수많은 짐승들이 새벽을 기다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가 하고 인규는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 밤이 끝날 무렵, 자신도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규는 병동 로비를 향해 달라기 시작했다. 지친 발이 자꾸만 허공을 헛디뎠다. 공기가 춤추었다. 숨이 차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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