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열 사람의 한 발자국
이 책은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위대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얼핏 보면 "엥? 뭔소리야..."하기 쉽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했다. 세상이 특별한 소수, 위대한 1%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TV와 신문에는 정치인,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이 등장하고 역사책에는 늘 뛰어나고 특출난 위인들이 실리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에는 예쁘고 멋진 셀럽들이 자신을 뽐낸다.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결국 세계를 이루고 움직이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일하고, 사랑하고, 사고 팔고, 선택하고 결정한다. 부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신기한 점은 우리는 오직 자신의 인생을 단 한 번만 살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권력이 세도, 명예가 높고 인기가 많아도 자기 인생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갈아탄다거나 한번에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 수는 없다.
나는 자주 잊고 있었다. 내가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저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역시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거야,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닮아있는, 또 나와 닮아있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과 닮아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마치 조물주가 되어 여러 인간들의 인생을 머리 위에서 비디오테이프 같은 걸로 돌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중인격 같기도 하고, 영화 '뷰티 인사이드'가 연상되기도 한다.
또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구조대원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마지막 영화관에서 등장인물들이 만나 함께 빠져나오기까지 인물들의 관계와 거리를 가늠하는 게 마치 퍼즐 맞추기 같았다.
삶은 모두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으며 또 그들에게 영향을 준다.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들 각자에게 이야기를 하게 하고, 그것들을 엮어 사람들을 위치시키고, 그들의 입으로 삶의 단면들을 말하게 하는 저자의 능력이 부럽다.
<유채원>
효율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뇌였다. 적재적소에 귀신같이 배치된 사람들이 각자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런 뇌. 채원도 자신의 자리를 오래도록 탐색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다리고 찾았던 그 적소가 어쩌면 여기일지도 모른다고 최근에야 드디어 생각이 들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하중이 걸리는 자리였다. 하지만 채원은 스스로가 단단한 부품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중을,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를, 온갖 고됨과 끝없는 요구를 견딜 수 있는 부품이란 걸 어떤 자기애도 없이 건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바닥 위의 티타늄 볼트를 내려다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어려운 구석에 놓여도 기능할 수 있는 조각이니까, 제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최애선>
아가야, 웃으렴. 겁내지 말고. 팔매질을 하렴. 운동회 날 박을 터뜨리려 애를 쓰는 아이들처럼. 싸우렴. 다치지 말고. 구멍에 빠지지 말고.
<김의진>
"나중에 하나도 기억 못하겠지? 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의진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기간들이 얼마나 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더니 눈물이 조금 고였다.
"그래도 괜찮아. 기억하는 나이가 되면 더 좋아해줄 거야."
민희가 다가와서 재준을 넘겨 받았다.
<서진곤>
"아빠, 어떤 일들은 너무 복잡하게 엉망이어서 벌어져요. 아빠가 바꿀 수 없었어요."
연모도 말했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진곤의 손등에 얹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어린 얼굴로. 그래도 진곤은 연모가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했다. 연모의 손이 계속 굳은 살 없이 부드러웠으면 했다. 사과나 깎으면서, 엉망인 세계를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이호>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호 선생은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권나은>
나는 승희 옷을 입고 대학에 갈 거야. 승희 옷을 입고 다닐 거야. 내가 입으니까 하나도 안 예쁘지만, 어쩌면 졸업할 때까지 더 친해지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졸업하고 나선 한번도 못 만났을 수도 있지만, 나만 승희를 좋아했던....
아마도 잊어버릴 것이다, 승희를. 나은은 그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다. 왜냐하면 벌써 중학교 때는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승희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애였다. 그걸 잊지 말아야지. 안 잊을 거야.
<이설아>
설아는 해바라기 센터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기부금을 투명하게 쓰고, 세세하게 기록하고, 그걸 공개하고 나면 또 1년이 갈 것이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채 다친 동물처럼 실려온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그 일이 이제 지나갔다고 말해주면서 1년이 갈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할 테고, 거기에 끈질기게 대답하는 것도 1년 중 얼마 정도는 차지할 테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방승화>
그래 봤자 지난 세기의 이야기. 승화의 몸과 마음을 혹독하게 다뤘던 엄마는 죽고 없다. 승화는 안도하고, 안도할 때마다 스스로를 미워한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소현재>
"그것보다는 늘 지고 있다는 느낌이 어렵습니다."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압축이 쉽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우리들의 세계에선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죽고, 다치고, 누군가는 태어나 처음 걷고, 누군가는 죽이고, 다른이는 살리고,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울고 웃고 하면서. 문득 내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도, 나와 아주 잠깐 얼굴을 맞댄 누군가의 인생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참 신기하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인물은 설아와 채원. 자기 일을 끝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내고, 지지 않아야 할 때는 지지 않는 그 능력과 성깔이 부러웠다.
노의사 이호의 긴 대사에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결국 모두가 돌을 던지는 릴레이 물수제비를 하고 있는 걸까. 왠지 내가 보지 못하고 눈 감을 다음 세대를 향해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계속 던지고, 던지고, 다시 주워 옳은 방향으로 던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