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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by 곰곰곰곰 2021. 7. 11.

★ 나의 한줄평: 감각과 맞닿아있는 책

 

한강의 이름을 보고 도서관에 신청해 빌려보았다. 

먹구름이 하늘에 융단처럼 펼쳐진 흐린 날에 읽기 좋은 책이다. 종이는 어둑어둑하고, 책장은 습하고, 글자는 가라앉아있다.

이 책은 소설집이고 다른 제목을 가진 여섯 개의 단편으로 묶여있다. 인물과 상황은 다 다른데 배경을 이루는 정서는 비슷하다.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슬픔과 더러움, 구질함과 아픔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나온다. 한번에 싹 낫는 것도 아니고 오래 죽어있는 것도 아니다. 단편들은 모두 얼마만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 여수의 사랑: 여수를 잊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서울서 일하다가 사라져버린 여자 자흔과 그녀와 함께 동거했던 주인공 '나'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여수에서 사랑을 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나니 '여수를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업자와 대학생과 중년 여인들이 가득한 지하철의 진동에 가볍게 몸을 흔들리며 나는 주사 기운이 혈관과 림프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요동치던 안두통이 서서히 잠잠해졌고 경직되었던 위장은 차츰 말랑말랑해졌다.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나'는 세상의 불결함을 견디지 못해 토악질을 하는 사람이다. 허투루 살지 못해 늘 위장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 결벽증이 도져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마지막 룸메마저 떠나버린 어느 날, '나'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자흔을 룸메이트로 맞게 된다. 그녀는 '나'의 고향이 여수라는 것을 알고 뛸듯이 기뻐한다. 그녀는 세상에 정 붙일 곳이 없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모든 역사 속 떠돌이들을 대변하는 것 같은 캐릭터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어 자기 몸마저 그런대로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결국 기차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하며, 자흔은 짐짓 일그러뜨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나'는 급기야 모든 사물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기에 이른다. 자흔에게서 여수의 냄새와 꿉꿉한 기억들이 풍겨오자 '나'와 자흔의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된다. 자흔은 왔을 때처럼 허술하게, 많은 흔적을 남겨놓고 떠난다. 

 

 그녀가 손을 뻗는 곳에서마다 꿈틀거리는 선창가의 노랫소리, 구슬피 흐느껴 우는 소리, 밤새워 가슴을 앓는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조그만 체구의 내 어머니가 숨을 거두며 마지막으로 토해냈던 무시무시한 기침 소리가 자취방의 벽면을 타고 음습한 메아리를 울렸다.

언젠가 자흔이 나에게 고백했던 것처럼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하루가 끝나면 차라리 모든 것이 함께 끝나기를 바랐다. 날마다 눈에 보이게 무너져가는 자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차라리 고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야기 속 '나'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 발묶여 잠겨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기침을 토해내던 어머니, 뿌리쳐 손을 놓아버린 동생, 나를 잡아채 같이 죽으려고 물속으로 들어간 아버지, 그리고 홀로 깨어난 '나'의 이야기를 여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흔적을 지우고, 냄새를 없애고, 공기를 내보내버리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여수의 바다를 고향으로 삼는 자흔은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부주의하고, 산만하고, 가는곳마다 자신을 남겨놓는다. 묻고 싶어하는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나'는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런 나를 보며 우울해하다 자흔은 떠날 거라고 한다. 그리고 가지 말라는 '나'를 안고 품어준 다음 날, 그녀는 훌쩍 떠난다. 자신의 고향으로, 그게 어디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낯익은 것이 없었는데도 마치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품속에 돌아와 있는 것 같았아요.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녀의 부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내가 뿌리친 자흔의 손, 그녀가 가지런히 허공에 펼쳐 보이곤 했던 열 손가락들이 내 수많은 혈관들을 비집고 살갗 속으로, 숭숭 구멍 뚫린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자흔의 존재와 부재로 '나'는 그간 뿌리쳤던 많은 기억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애써 외면했던 슬픔이고, 조용히 묻어두고 없는 것처럼 대하고 싶었을 아픔이다. 또한 못나고 불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근간이다. 삶은 기쁘고 찬란한 순간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흔'은 사라진 삶의 조각을 찾아내 쥐어준 '나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지우려고 그토록 애썼던 '나'를 찾기 위해 여수에 당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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