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람의 연기/수행
- 우리는 사람다움을 연기한다. 그리고 타인이 하는 연기를 믿어준다. 그것은 상호작용적 의례이다. 우리의 인격은 상호작용 속에서 끝임없이 현상하는 무엇이다. 고프먼은 이를 "얼굴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의 내부나 표면이 아니라, 만남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퍼져 있다."고 정리했다.
- 이러한 해석은 정말로 신선하다. 교육학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본성을 고찰했고, 대부분 인간성을 생리적으로 '타고 나는 것' 또는 훈련을 통해 '획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람됨은 '서로를 통해 만들어진다'니.... 놀랍고 경탄할만하다. 아름다운 해석이다. 김현경은 이 책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연기'한다고 표현한다. 사회는 거대한 무대이고, 인간은 배우로서 사람됨을 연기하며 서로의 연기에 속아준다.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그래서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얼굴은 상호작용 속에서 가정되고 또 실현되는, 의례적 픽션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행위자로서 목표지향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의례를 수행한다. 이는 총체로서의 사회가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로 이원화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 우리는 가면(사회적 역할 또는 성격)을 연기하면서 사람이 된다. 얼굴은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가면과 얼굴은 연극에서도 많이 접한 오래된 비유이다. 험난한 사회생활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지친 얼굴로 짐을 내려놓는 누군가가 상상된다. 그런데 바깥의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면,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얼굴과 가면이 대립적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저자는 명예와 존엄을 설명하며 얼굴과 가면이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공적 공간에서 획득한 명예와 신분을 버리고, 자유와 평등이 놓여있는 존엄의 침실로 후퇴해야 하는 걸까?
교사 감투를 썼던 발령 첫 날을 떠올린다. 벌써 5년차가 된 지금, 나는 '교사로서의 자신'과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이분하지 않는다. 그가 나이고, 내가 그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시작했던 역할놀이가 아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역할극이 되고, 이제는 삶과 뭉쳐 분리할 수 없는 드라마가 됐다.
하지만 명예와 존엄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옷을 입은 인간'에 그리고 후자를 '벌거벗은 인간'에 귀속시킴으로써, 버거는 존엄 역시 문화적인 관념이며, 사회적인 의례를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지위와 역할이 다른 개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사회 공간 안에 현상하는 것은 이러한 의례들에 힘입어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의례적인 실천들의 바탕에 있는 규범을 단순히 "진정한 자아"와 대립하는, 외적이고 강제적인 힘으로 간주할 수 없다.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상호작용과 그것을 조율하는 규범의 존재야말로 버거가 "존엄의 세계"라고 명명했던 현대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 결국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도 혼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더이상 아무도 오지 않는 밀실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자신의 동물성일 뿐이다. 그러니까 먹고, 자고, 싸는 본능적 욕구에 천착하는 나.
그러므로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사람이 된다. 내가 존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 뿐만 아니라) 누군가 나를 존엄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무섭다. 같이 사는 사람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 되고, 내 얼굴이 또 함께하는 타인의 얼굴이 되는 거니까.
4장 모욕의 의미
- 이러한 논지에서 해석한 모욕은 한마디로 사람대접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모욕을 다룰 때, 감정과 표현의 자유 문제에 갇히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현대사회에 지배적인 상호작용의 의례 속에서 누군가에게 인격을, 신성함을, 깨끗함, 가시성, 공간을 할당하지 않는 행위이다.
상호작용 의례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에서의 그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 인격이란 "집단적 마나의 할당"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의례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한 명의 온전한 사람임을 부인하는 일이자, 그 역시 공동체의 마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 그의 성원 자격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는 보통 인격을 개인의 특징적인 성격으로 여겨왔다. 김현경은 다른 주장을 한다.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 그 안에 있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따라서 인격은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로 표현되는 무엇이다.
따라서 상대가 나의 인격을 확인해주지 않는다면 사람으로서 나의 인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수용소의 재소자들이나 장애인, 병원의 환자들, 흑인이나 소수자...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모욕당하는 자가 사회 안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한마디로 차별을 견디거나 그것을 거부하고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다. 여기서 모욕의 예시로 체벌이 등장했는데 학교에 다닐 때 선생으로부터 뺨을 맞거나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는 경험담을 읽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모욕(체벌)은 당하는 자에게 '나는 이래서 맞을 만해'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도록 강요하는 가스라이팅이다. 인간 존재를 흔든다는 점에서 참 사악하다.
온전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민은 여성, 외국인, 장애인, 총체적 시설의 재소자 등등과 비슷하다. 그들은 상호작용의 장 안에 양반, 남자, 국민, 정상인, 일반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의례 교환에 있어서 불평등을 경험한다. 우리는 신분차별을 장소/자리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사회를 이룬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은, 진정한 신분 질서의 해체와 맞닿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격은 '사람이 되어야만' 받을 수 있다. 교육제도와 성원권에 대한 짧은 고찰은 울림이 정말 컸다.
나는 과연 학교 밖에서, 정규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채 사람이 된 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마음 속에 저마다의 영토를 확정한 채 울타리 밖의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을 내 영토에 들일 것인지 사람으로 환대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가늠하면서 말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 김현경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공고한 신분주의의 찌꺼기와 학교폭력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의미심장하다. 그는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 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 안의 신분주의를 해체하고 우리가 서로를 온전하고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구조의 변화가 필수적일 것이다. '누구든 사람으로 취급하라'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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