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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by 곰곰곰곰 2021. 3. 3.

★ 나의 한줄평: 우리는 환대를 통해 사람이 된다.

 

1장 사람의 개념
-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다른 이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때, 인간은 사람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줄곧 내 자리를 고민해왔다. 오늘은 퇴근하다가 첫 해 가르쳤던 제자 수민이를 만났다. 요즘 고민이 있다며, 새학기가 되어 새로운 친구들과 만났는데 친해지는 게 어렵다고 했다. 이미 자기들끼리 친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어색함과 긴장, 설렘을 메고 등교한 우리 반 아이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리를 찾는다. 그러니까, 이 공간 안에 자리를 넓혀가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태아를 어느 시점부터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는 문제에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뱃속에서 죽은 태아를 위해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모체의 포궁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이름을 얻으며 태아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 노예는 특정한 장소에 있으나 사람됨을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다. 주인에게는 그들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환대해줄 사람들이 있지만, 노예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현상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반면 노예는 고립되어 있기에 무력하다.

 

한 마디로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내 편이 있어야 한다. 집단 안에 나를 알아봐주고, 내 자리를 마련해주고, 공격으로부터 감싸며 옹호해 줄 타인이 없다면 '사람으로써의 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즘 유명인들이 학교폭력 이슈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교실 속 왕따를 떠올렸다. 그는 그곳에서 없는 존재다. 현상되지 않는, 무리를 이루지 못한, 우리에 속하지 못한 존재다.


- 군인은 전쟁상황에서 특수한 존재가 된다. 그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로 취급된다. 이전과 달리 현대의 군인들은 명예나 신성함 따위가 없는 벌거벗은 생명들이므로, 현대전은 오직 물리적으로 적을 최대한 살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군인에게 우호(또는 환대)의 권리가 없다는 것과 그가 물건처럼 소모된다는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환대는 사람의 권리이며, 환대를 통해 우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 전통 사회에서 사형은 그 자체가 성원권의 박탈 의례였다. 그러나 사형이 '인간화'된 방식으로 조용하고 깔끔하게 처리되는 지금 사형수는 성원권의 외부로 밀려나 있는 존재이다.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가 떠올랐다. 치매노인은 어떠한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또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면, 그 공간에서 그를 죽음을 유보한 동물의 일종으로 취급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쩐지 슬퍼졌다. 우리가 함께하던 세계에서 할머니를 떼어내 안 보이는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할머니는 가끔씩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게 슬프다.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 물리적으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므로, 사람의 개념은 장소 의존적이다. 

우리는 자아나 존재를 대부분 정신적인 영역에서 다뤄왔다. 저자는 굉장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인간됨이 우리가 있는 장소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는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사람으로 사귈 수 있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 받는다. 

 

- 노예는 인정투쟁, 곧 성원권 투쟁의 외부에 있다.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인은 노예에게 속박과 굴종을 강요하며, 노예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명예에 집착한다. 플라톤은 이를 타이모크라틱한 인간으로 칭했다. 한국의 '상전', 양반문화와 비슷하다. 명예와 위계에 집착하는 인간의 전형, 내가 싫어하는 마초나 꼰대들을 학술적으로 풀이한 구절을 보니 재미있고 속 시원했다. 그들은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서열로 인식한다. 나보다 위인가, 아래인가, 아니면 평가보류인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에게서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기도 한다. 꼰대선배, 나잇값 못하는 어른이 되지 않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그가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느냐, 국적을 취득했느냐, 문화적으로 내국인과 차이가 없느냐와는 관계없다. 사회적 성원권은 구성원들이 물리적으로 함께있는 그를 '사람'으로 대우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 다양한 오염의 메타포는 특정인의 '사람됨'을 빼앗는 도구로 사용된다. 주인은. 남성은, 백인은 노예를, 여성을,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더럽다는 딱지를 붙여 (그들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을 분리하고, 공적인 공간뿐 아니라 사적 공간에서 배제시키며, 비가시화한다. 이 주제에 관련된 예시들이 와닿았다.

 

오염을 피하려는 행동은 "소중한 분류 체계에 모순과 혼란을 초래하는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거부반응" 이상의 무엇이다. 이 글은 오염의 메타포를 성원권에 대한 부정 또는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성원권의 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다.

 

- 사람들이 직장 내 성폭력이나 디지털성착취, 성희롱 같은 성범죄 사건을 대할 때, 그것을 개인과 개인의 감정 불일치, 소통의 오류 등으로 오인하는 이유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권력의 위계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범죄는 치정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사회 내에 공고하게 존재하는) 배체와 차별의 조직문화에서 비롯된 정치적 폭력에 가깝다. 가해자는 우월한 사회적 공간을 점하며 스스로를 비호한다. 그는 범죄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는 피해자를 압박하는 다양한 수단도 가지고 있다. N번방에서 어린 청소년들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착취했던 가해자들은, 또 그러한 범죄를 방관하며 적극적으로 소비한 가해자들은 흑인 노예를 부리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백인 주인처럼 굴었을 것이다. 

- 우리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를 사람으로서 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됨을 잃지 말자고 생각한다. 타인을 사람으로 환대하지 않는 순간마다,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때마다 나의 사람됨도 부식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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