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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by 곰곰곰곰 2021. 2. 1.

★ 나의 한줄평: 그리고 재를 넘는 사람들...

 

도운이에게 선물 받아 읽게 된 책 '나라 없는 나라'.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틈틈이 읽다보니 더 몰입이 잘 돼서 나흘만에 완독했다.

 

제목이 인상적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쩐지 몇 년 전에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제목 같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이 책의 인상은 을씨년스러운 겨울 같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처럼 서늘한 느낌이다.

 

이야기는 먼 동이 튼 새벽, 서릿발 같은 대원군과 횃불 같은 전봉준의 대담으로 시작된다.

첫 문장이 아름다웠다. '농묵 같던 어둠이 묽어지자 창호지도 날카로운 빛을 잃었다.'

어둠을 뚫고 온 전봉준의 기개에 꼿꼿한 대원군의 눈매가 누그러진다는 뜻일까? 이렇게 해석하면 재미있다.

 

- 나라에서 철통같이 에워쌌거늘 무슨 재주로 들어왔던가?
- 뜻을 두고서야 이르지 못할 데가 어디이며, 정성이 지극하면 닿지 못할 바 무엇이겠나이까? 썩은 나무로는 물을 가두기 어렵고, 버석거리는 흙으로는 낙수를 모으지 못하는 이치입니다.

 

두 사람의 첫 마디도 의미심장한데, 대원군은 나라를 '철통 같다'고 묘사하지만 전봉준은 조선을 '썩은 나무'와 '버석거리는 흙'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대사.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한다는 김봉집, 전봉준, 전녹두, 그의 말...

 

-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나이다.

- 바르게 세상 이치를 펴는 일이라면 여항의 백성보다 적합한 이들이 없나이다. 때가 오면 흙을 갈고 비가 오면 물을 대니 그들이 어찌 순리를 모른다 하며, 함게 누리는 즐거움을 낙으로 아는 자들인데 그것을 다만 무지라 하겠습니까. 사대부들이 있다 하나 그들의 일이 노니 소니 벽이니 시니 풀뿌리 하나 나고 자라는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노상 의리를 이야기한들 어찌 그것을 정치라 하오리까?
- 하면 상이 반이 되고 반이 상이 되면 그것이 그대의 원인가?
- 반도 없고 상도 없이 두루 공평한 세상은 모두가 주인인 까닭에 망하지 않을 것이며, 모두에게 소중하여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강병한 나라 아니옵니까? 비록 양이라 하나 그들은 민회를 만들어 다스리는 법을 정하고, 임금을 백성이 뽑는 나라도 있다 들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나라입니까, 약한 나라입니까?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한다는 구절을 보자 목에 걸린 떡이 막걸리에 내려가듯 속이 시원해졌다.

요즘 누가 이런 말을 하지?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거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타인을 위해 죽는다? 민중을 위해 죽는다? 세상 누가 웃음기 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 "잘해주면 호구된다."면서 선의의 가치를 후려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 당연한 이치일까. 그래도 너무 슬프지 않은가. 당신을 위해 죽겠다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과 바보 취급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 하는 세상은 정말로 천지차이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순리를 깨달은 걸까, 아니면 순리를 잊어버린 걸까.

 

책 속 이백여 년 전의 조선은 지금의 대한민국만큼 위태롭다는 점에서 매한가지이긴 하다. 

청이며, 왜며 살쾡이처럼 허약한 나라를 노리는 외세, 망해도 나만 안 굶으면 된다는 심보로 손 놓고 있는 사대부와 양반들, 근대화랍시고 이참에 한탕 해먹어보려는 개화파들.... 그래서 너무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고, 이리로 가도 죽고 저리로 가도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심지어 어떻게든 나라 좀 바로세워보겠다고 일어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급함이 다르고, 목소리가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안 읽어도 결말을 알기에 계속 한숨을 삼키며 읽었다.

 

아이에게 어미의 눈을 감기게 하고 망자의 몸을 물 묻은 무명으로 닦았다. 시늉뿐인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힐 적부터 소리는 내지 않았으나 을개의 눈에서는 몇 줄이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우지 마라 아가. 조선 천지에 너뿐이겠느냐?

찬물을 들이켠 그가 중얼거렸다.
- 결핍이 세상을 이룰 것이다.

- 우리는 백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로 가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대원위 한 사람의 힘이나 몇몇 개화당의 힘으로는 구하지 못할 것이오. 하물며 민씨 일족을 일러 무엇하리오.
이들로부터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직감한 정석희는 그쯤 되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근면하고 나름대로는 진쥐적으로 산다고 하였지만 나라가 처한 상황과 권력에 접근하려는 세력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논설을 늘어놓는 장두 앞에서 그는 단지 왜소한 자에 지나지 않았다. 꿈을 꾸는 자 앞에서 작은 안락함이란 실로 누더기가 아닌가.
- 그것은 어렵고 고단한 길이오. 실패할 거요.
- 그렇다면 백성에게 다른 방도라도 있소?
어렵고 고단한 길이기에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애로워야 충이고 뭐고 생겨납니다. 백성은 뼛골을 바쳐 조세를 담당하지만 그것이 백성을 위해 쓰인 일이 한 가지나 있었소? 비바람을 막아주는 헛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억압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이 세상 너머에 있소.

 

세상을 바꾸려는 자 앞에서 일상의 안락함은 얼마나 초라해지는가.

세상 너머에 세상을 건설하려는 자 앞에서 일신의 안온함은 얼마나 저급해지는가.

결핍으로 신음하는 자 앞에서 풍요와 사치는 얼마나 악덕해지는가.

굶어죽은 어미를 앞에 두고 우는 자식에게 세상에 그런 아픔을 겪는 이가 너뿐이겠느냐고 위로할 수밖에 없는 심정은 또 어떨까.

그래서 그들은 실패할 것이 뻔한 길로 기어이 가려는 것이다. 어렵고 고단한 길로 향하는 것이다. 재를 넘을 수 있는 길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 대체 누구와 싸운단 말이오? 탐관오리요, 아니면 군적에 들거나 살길을 찾아 병사가 된 자들이요? 다 맞지만 다 그른 말이오. 우리는 이 나라의 꼭대기에 있는 자들, 그들이 만든 제도며 심법과 싸우는 것이오. 
-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며 보국안민은 대체 무엇이냐고. 머리에 든 몇 가지 지식을 말로 꾸며 말할 수 있겠지요. 개화당의 장점이며, 기존 왕조의 본받을 만한 일이며, 우리가 향리에서 몸소 느껴온 미풍양속도 있소. 그러나 그것은 말이지 실재가 아니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오직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행동으로부터 도달하려는 세상의 품격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임금의 효유문을 가져온 왕사와 선전관을 벤 일을 두고 김개남과 전봉준이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립하는 모습이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동료여도 모든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같은 방향을 보고 출발했으나 목적지까지 닿는 방법이 다를수밖에 없다. 그들이 건설하려는 세계는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세계이다.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던 세계이다. 그래서 혼란과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기도, 제도도, 정보도 없는 변방에서 그들이 기댈 곳은 오직 사람뿐이다. 함께 꿈꾸는 사람이 많아지면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러니 새로운 세상의 품격을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전봉준의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힘이 세다.

 

-우리 군사는 하찮은 허울 따위 넘어선 사람들이오. 지금껏 생겨난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단 말이오. 그러니 군사뿐 아니라 함께 일을 겪은 백성은 더 이상 지금을 사는 사람이 아니며, 다음 세상에서 온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강상을 말하자는 게요? 옛날로 가자면 게서 죽을 뿐이니 감사께선 이해 못 하시겠지요? 우린 조정과 화약을 맺겠소.

적은 분명하되 시작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적은 강성하고 이쪽은 강성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백성은 나서고 있었다. 지더라도 싸워야 한다는 그들의 명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지요?
추수 끝의 들판처럼 동공이 허전하였다.
- 과연 그렇겠지요. 그러나 나는 죽을 것이로되 순상께서는 왜의 주구가 되어 살아갈 것이니 제가 위로를 드려야겠습니다. 한들 무에 두렵겠습니까? 순상께서는 우리와 손잡고 고을을 다스렸으며, 왜와 일전을 앞두고 병장기며 군량을 모으셨으니 후세에 빛날 것입니다. 우린 벌써 이루었지요.

아무리 마음 좋은 주인을 만나도 노비는 결국 코가 꿰어 말뚝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인데 비로소 코뚜레를 벗게 되었던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처럼 운현궁을 벗어나자 먼 데까지 한눈에 보게 되어 가라는 곳이 아니라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 받아먹지 못한 환곡을 갚고, 노상 부역에다 군포는 군포대로 내는 세상으로 다시 가겠느냐? 양반의 족보를 만드는 데 베를 바치고 수령들 처첩까지 수발을 들면서 철마다 끌려가 곤장을 맞을 테냐?
- 이제는 그렇게는 못 살지요.
- 나도 그렇게는 못 산다. 우리는 이미 다른 세상을 살았는데 어찌 돌아간단 말이냐?

 

김학진과의 대화에서 마지막을 점치는 전봉준의 말이 슬펐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떠나는 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을 곳으로 뛰어드는 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잊힐 것을 알면서도 나서는 자의 마음은, 그러면서도 후세에 기억되길 바라는 자의 마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오르는 자의 마음은? 

 

흰 옷을 입은 농군들의 시체가 눈처럼 쌓여 산을 이루는 결말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재를 뒤덮은 자들, 살기 위해 죽고자 했던 자들은 언제나 있었고, 결국 그들이 재를 넘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과거가 이어져 온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계속해서 재가 나타나지만 결국 재를 넘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재를 넘을 것인가? 매서운 추위가 질책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 선생님, 저 재를 넘으면 무엇이 있습니까요?
- 몰라서 묻는 게냐? 우리는 이미 재를 넘었느니라. 게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이 재 너머에 있던 것들이다. 
-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 아니다. 재는 또 있다.
- 그럼 그건 어쩝니까요?
- 그냥 두어도 좋다.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 길이 멀다.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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