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당신,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
세상에는 선함이 이기는 이야기도 있다고, 별 건 없지만 그럭저럭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제 할 일을 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살다보면 나쁘지 않은 것도 많다고 말하는듯한 책이었다.
등산을 하다 당이 떨어질 때, 주머니 속 초코바 껍질을 하나 까서 입에 넣으면 기분이 화-하고 좋아지는 것처럼 살다가 인류애가 떨어질 때 입에 넣고 싶은 이야기였다.
책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이상한 젤리를 보는 이상한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사실 넷플에서 영상과 동시진행했기 때문에 책과 드라마가 뒤죽박죽 섞인 상태다.
은영은 또 어딘가에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은영에게 없는 건 많았지만 일복만은 항상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일해야 할 것이 뻔했다.
"그럼 같이 찾읍시다."
인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남의 소원을 훔쳐서 살다니, 얼마나 이상한 인생인가. 은영은 자주 자조적이 되었다.
인표가 지하실에서 은영을 보고 '아아아, 역시 이상한 여자구나.'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웃겼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한 면이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는 마치 자신에게 이상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마냥 군다. 그러다가 결국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같이 일하는 것도 웃기다.
이 책에서 제일 많이 나온 말은 아마도 '이상하다'일 것이다. 이상한 은영, 이상한 인표, 이상한 승권, 이상한 혜연, 이상한 매켄지, 이상한 정현...
은영은 죽겠다,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실은 의욕이 넘치는 보건교사였다. 인표를 설득해 응급처치 교육에 필요한 의료용 더미를 중고로 업어 와서 다른 선생님들의 양해를 얻어 20분씩 수업을 했다. 기도 확보하는 법,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 흉골 압박 심마사지를 가르쳤는데 설령 태반이 까먹고 일부만이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중 한 사람이 언젠가 누군가를 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멀고 희미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을 좋아했다. 멀미를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면 나아지는 것과 비슷한 셈이었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은영이 폭력적이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방식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좋다. 친절하고, 무해하고, 바보 같고, 평범하게 이상한 사람이라 좋다.
아, 한문 선생이라서 다행이다. 동년배의 다른 과목 선생이었다면 하나도 못 읽었을 거야. 인표는 전공 선택에 대한 뒤늦은 만족감에 잠시 빠졌다가 다시 보건선생을 찾아 나섰다.
역시나 웃긴 부분.... 전공선택이란.... 쓸데 없는 데 떠오르는 지식에 혼자서만 흐뭇해 하는 것.
"고대에는 겨드랑이 털이 뜯겨 나간 날개를 뜻했다. 반역자들을 잡아다 기름 솥에 넣기 전에 확실히 하려고 겨드랑이 털을 밀었지. 세상에 그렇게 수치스러운 형벌은 없을 거야." 인표가 지어낸 말에 민우와 지형은 넘어가고 말았다.
선생님이 되며 느는 것은.... 적당히 유창하게 둘러대는 기술 뿐. 얕고 넓게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풍성한 재료로 다양한 화술을 구사할 수 있다.
정현과 과자를 먹는 시간은 완전한 휴식과 이완의 시간이었다. 되도록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자고 은영은 정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마음먹었다.
하나도 자라지 않은 정현은, 종종 은영도 아직 아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정현이 아파했더라면, 혹 정현이 한 사람에게라도 해를 끼쳤다면 예전에 정현을 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은 너무나 무해했다.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정현처럼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아직 있어야 할 것 같아."
- 나쁜 일들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곳이야.
"나쁜 일들은 언제나 생겨."
너한테도 생겼잖아. 은영은 강선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최대한 차분하게 마주보았다.
-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응."
"저는 난데없으니까요."
은영이 멍하게 혜민을 바라보았다. 혜민이 귀찮아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정말로 난 데가 없어요. 부모가 없어요. 그냥 어느 날 눈 뜨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은영은 스무 살에 끝나 버리는 인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역시 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구해 주러, 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러 오지 않는다. 그날 저녁 은영은 혜민과 패스트푸드를 먹기로 했다.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들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완벽하게 둥근 구가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각이 있고, 선이 있고, 점이 있다. 그것들을 허물기도 하고, 뭉개기도 하고, 세우고 비틀기도 하면서 존재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뭉툭하고 어느 정도는 둥글게 어울려 산다.
수학시간에 도형을 배울 때, 주어진 면적을 정해진 도형으로 남는 부분 없이 꽉 채우도록 하는 문제가 나온다.
세상도 그렇다. 우리는 어찌됐든 세상을 채워야 하는데 서로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겹치거나 모자란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근데 그게 사는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어찌됐든 채우기 위해 노력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이건 기분 좋은 위안이다. 잔잔한 파문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친절하자고, 친절하다 힘에 부칠 때는 잠깐 도망쳤다가 다시 친절해지자고 다짐한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두 번째 지구는 없다 (0) | 2021.02.08 |
|---|---|
| 나라 없는 나라 (0) | 2021.02.01 |
|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0) | 2021.01.18 |
| 명상록2 (0) | 2021.01.14 |
| 명상록 (0) | 2021.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