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알면 알수록 사람을 쓰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쓰고, 다른 사람에 관해 쓰고, 사람이 모인 우리와 그들에 대해 쓴다.
'수업에는 교사가 묻어난다.'라는 문장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수업에 묻어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글은 더욱 그렇다. 도운이가 "사람은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글로는 못 속여."라고 말했었는데, 그래서 자기는 때때로 자기의 글을 보여주는 게 두렵다고.
나도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한다.
내 글에 묻어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나를 쓰는가? 어떤 단어로 나를 세상 앞에 내어 놓는가?
독자가 되어 내가 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진짜로 더럽게 재미있는 상상이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아이들은 자주 쓴다.
남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사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아이들 마음속에서 달궈지는 것을 나는 본다. 우리는 남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어휘를 늘려가는 존재들이다. 글쓰기는 글쓴이를 멀리 가게 만들기도 한다. 미래로든 과거로든, 나에게로든 남에게로든 말이다.
이안이와 제하는 자신들이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날마다 하는 이들의 모습을 새삼 생각하며 짧은 글을 완성한다. 잠시나마 나의 고달픔 말고 다른 이의 고달픔으로 시선을 옮겼던 흔적이다. 나는 그 흔적이 자아의 이동 혹은 자아의 해방임을 안다. 시선을 이동하며 나에게서 해방되는 축복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싶다고 소망한다.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 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가장 어려운 우정은 자기 자신과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몸의 감각에 대한 글쓰기는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아이들 각자의 이 방식들을 나는 글투라고 말한다. 글투는 문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물론 이 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각자 타고난 얼굴이 있긴 하지만, 어떤 작가들을 흡수하느냐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도 글투를 미세하게 재형성하며 글을 써나간다.
그들의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반 태훈이는 맞춤법을 아주 많이 틀린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태훈이가 글을 쓸 때 종이를 보지 않고 딴곳을 본다는 걸 알려준다. 글을 쓰느라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주로 앞에 있는 선생님이나 옆에 있는 친구들을 오간다. 항상 히힛하며 관심거리를 찾는 꾸러기 같은 모습이다.
짧은 글에 앞뒤 안 맞는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무척 따뜻해서 귀엽다. 서툴러서 더 매력적이다.
우리 반에 두 명 있는 다은이 중 최다은은 본인처럼 반듯반듯한 글을 쓴다. 글을 쓰라고 하면 다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온통 집중하느라 앞에서는 정수리만 보인다. 여러 번 썼다 지우고, 이미 다 썼는데 다른 종이에 새로 쓰기도 한다.
그의 글에서는 자신을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사람 특유의 신중함이 묻어난다.
반면 박다은은 아주 딴판이다. 생각나는 것을 바로바로 말하는 성격답게 다은이는 글도 말하는 것처럼 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제 엄마와 장을 보러 갔다. 그런데 마트에 내가 찾는 라면이 없어서 너무 서운했어요.'
원고지를 주고 40분 동안 실컷 설명을 해줬는데 위아래를 바꿔서 써놓은 탓에 기함을 한 적도 있다.
"다은아, 정말 창의적이구나.... 원고지를 거꾸로 쓰다니...." 흐뭇해하는 얼굴에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 중 동생인 서진이는 차분하고 깜찍한 아이이다.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따르려는 친구라 어려워도 주어진 분량을 꽉꽉 채운다. 약간 허술한 점이 매력이라 가끔 가다 자주 맞춤법을 틀린다. 그의 글에는 자기보다는 주변 사람이 더 많이 등장한다. 선생님과 친구들,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처음에는 '대체 누가 썼지?' 헷갈리는 글들도 12월 이맘때쯤이면 첫 문장만으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것이 재미있다.
나는 수없이 글을 읽으며 그 아이를 읽어내려간다.
그 말에서 '일기 같다'는 피드백은 글쓴이르르 부끄럽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는 자신과 거리를 둘 줄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위적인, 객관화에 게으른, 자기 세계 안에 갇힌, 오로지 본인을 위해서만 쓴 글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작가의 글은 일기 이상이어야 한다는 걸.
실수 없이 하는 건 궁금해하는 일뿐이다. 네 인생의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냐고 물어보는 일뿐이다. 보여줄 수 있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쓰게 될 테니까.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다시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완성하게 될 테니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더라도 작가가 먼저 울어서는 안 된다고 나의 글쓰기 스승은 말하곤 했다. 그럼 독자는 울지 않게 될 테니까. 작가가 섣부른 호들갑을 떨수록 독자는 팔짱을 끼게 될 테니까.
어떤 책을 사서 읽더라도 그 책의 작가가 실제로 따라오지는 않느나. 작가의 역량은 책 안에 담긴 텍스트로 평가받기 때문에 집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다. 일일이 해명하거나 응답하는 대신 내 글을 고친다. 그리고 새로 쓴다. 다시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들여 새롭게 애쓸 각오를 하면 해명의 말을 꾹 참을 용기가 조금 생긴다.
좋은 글을 연습한다는 건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열한 살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를 쉬지 않은 것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자꾸만 나를 추동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사람에게 까인 날에도 글을 썼고, 할머니가 온 집안에 똥칠을 한 날에도 글을 썼고, 학부모가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며 엄포를 놓은 날에도 글을 썼다.
이상하게도 기쁜 날에는 글이 잘 안 써진다. 할 말도 딱히 없다. 글로 쏟아내버리면 손 안에 겨우 잡아챈 행복이 금세 빠져나가버릴 것 같다.
같은 원리로 죽고 싶을 때는 어느새 몸이 키보드 앞에 와 있다. 억울하고 슬프고 배신감이 느껴질 때도, 화가 나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거북이 등딱지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을 때도 글을 쓴다.
글로 삶을 덜어낸다.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을 파고들어 캐낸 다음 꼭꼭 뭉쳐 글을 쓴다. 그러면 고통도 슬픔도 삼킬 수 있는 알약처럼 느껴진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안에는 내가 베끼고 싶고 닮고 싶은, 부러워지는 문장이 가득하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마음이 온통 쏠리는 문장도 참 많았다. 아무튼 나도 오늘 글을 쓴다.
쓴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