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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2

by 곰곰곰곰 2020. 12. 17.

2장은 자아.

올해 내가 탐구했던 가장 큰 화두도 자아이다. 내가 모르던 나를 한꺼풀씩 벗겨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나와 친하지 않다.

나는 내가 그닥 좋지도 않다. 자신을 좋아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아하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런 외부의 힘은 네가 스스로 헷갈리지 않는 한 네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해.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타인만이 나를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온 존재가 휘청이기도 한다. 별말 아닌 말을 듣고, 그 말이 별말이 아닌 것을 알 때조차 기운을 내려고 온 힘을 써야 할 때도 있다. 

고통은 늘 이중적이다. 하나는 현실 때문에, 하나는 나 자신 때문에.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정혜윤이 이렇게 적은 말들이 내 안에서 자꾸만 거미줄을 친다. 그것의 규칙을 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알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건져올리거나 세상 속으로 나를 빠뜨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뿐이란 걸.

그런데 어쩔 땐 내가 그랬다는 걸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내가 나한테 상처를 입히는 거라고? 내가 나를 못나게 만들고 있다고? 이렇게 힘든 게 나 때문이라고?

"범인은 너야!"

모두가 이런 대사를 뱉는 탐정이 되고 싶어하지, 지목된 범인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꾸만 나약함 속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그녀의 모든 말들은 커다란 풍경화 속 하나의 기둥처럼 하나의 세로획 'I'로 축소된다. 그녀는 'I나I나I나'로 둘러싸여 있다. 어느 날 그녀는 담장을 해체한다. 그녀는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게 했다. 허락을 했지만 그것은 고된 일이었다. 담장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각조각 떼어내야 했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흘러내리는 옷처럼 떨어졌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그는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환적인 시간관 안에서 우리의 자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다. 실수하지 말자, 이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내 생각에 존 버저는 자신만의 원을 만들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만 자아는 끝없이 뭔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자아는 세상과 맺는 관계이다.

 

찌질한 자아를 비춰본다는 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음침한 생각, 속으로 하는 계산, 허황된 망상이 둥둥 떠다니는데 그것은 내 손과 발 끝에 가느다란 실로 묶여있는 것 같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그래서 나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가 그닥 좋지 않다고 느끼는 걸까?

심지어 달갑지 않은 나는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작품이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내가 싫어진다.

 

혜윤은 존 버저의 이야기를 들어 우리의 눈을 자아에서 돌려보자고 했다. 나를 떼어내면 보이는 풍경이 있고, 들리는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이름을 버리고 내가 영원히 남기고 싶은, 불멸할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나는 내 속에 들어있는 아름답고 슬프고 찬란한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것으로 약간의 희망과 위안을 얻었다. 다행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 이야기는 나의 일부가 된다. 앞으로 될 내 모습에 보태어진다. 나는 나를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즉, 나는 어떤 이야기가 불멸하기를 원했는가? 어떤 이야기가 계속되는 데 기여했는가?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자신을 창조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차례차례 다 버리고도 네게 남게 되는 것, 너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 네게 있는가?

 

3부에서 정혜윤은 사랑과 우정, 그가 그일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홀로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애처로워하고 보듬어줄 때야 진정한 자신일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낀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너희는 나를 만들었어. 너희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가 내 순간을 완성했어."

 

나를 잊지않고 기억해주는 친구들, 지루한 나를 꼬박꼬박 발견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싶었다.

"당신 덕분에 나는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어요. 용기를 내서 삶을 걸어갈 수 있어요."

 

무엇도 바라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만 골라서 내미는 가족들에게서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맛있는 것들을 해주는, 자식들을 먹이는 엄마를 사랑해.

어린 것들을 온몸으로 감싸느라, 세상에 맞서느라 너무 약해져버린 할머니를 사랑해.

먼 곳에서 우릴 먹여살리는 아빠를 사랑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창조하고 주목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타인은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를 기억하고 찾아낸다고 했다.

가끔 나도 사랑하는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묻는다. '그들 없는 나는 뭘까?' 그리고 '너 없는 나는 뭘까?'
이 질문 속에서 나는 아주 잠깐, 일시적으로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내가 아닐 거야."
이런 순간 사랑과 우정은 가장 진실한 존재 방식이다. 사랑과 우정에 다른 목적은 없다. 서로 친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나로만 가득찬 세계에서 수많은 나하고 합작해 만든 나는 별로다.

내 마음에 드는 나는 '(다른 이와) 함께 하는 나'다.

사랑하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 등불을 켜고 걷는다. 등을 감싼 얇고 흰 종이 너머로 무수한 별무리를 볼 수 있다. 

이런 나도 있구나. 온 우주에서 나에게 빛을 건네준 사람들 덕에 내가 좋아하는 나도 생겼다. 

 

우리는 현명하게도 빨리 물음표를 내리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책임감과 자괴감, 무력감을 동시에 덜어준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잔인한 면이 있다.

사람은 처절한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세상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카프카는 익사하지 않도록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고통은 나에게만 너무 무겁고 남에게는 너무 가볍다고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쁘리모 레비는 그 일을 오랜 시간이 흘러 정화시켰고 그때 내게 선물이 되었다고 했고, 쉼보르스카는 삶이 뜻대로 안될 때 그때 영혼이 생긴다고 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그런 고통이 세상에 없어야 하므로 다른 사람 누구도, 아무도 고통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겪은 성숙한 사람들은 남들의 고통을 보기 시작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 마틴 루터 킹은 '나는 무슨 일을 당할까?'에서 '그들은 무슨 일을 당할까?'로 질문을 바꾸었다.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고통에 놀라는 대신 그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했는지에 놀라는 것이 맞는다는 것과 고통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큰 실망감을 주었던 일도 그 일 없이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감옥을 나온 오스카 와일드는 종말을 향해 갔고 도스또옙스끼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누군가는 끝이라고 생각할 때 누군가는 시작했다.

 

나에게만 의미 있고 남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는 고통은 벗어버릴 때가 왔다.

지치지도 않는지, 에고는 계속해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주인공은 늘 나고, 결말은 계속 비참하다.

그러니 그만 하자. 그들이, 우리가, 인간이, 생명이, 온 우주가 겪는 고통을 떠올리자.

나와 닮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자.

'근데 다른 사람은 어쩌지? 근데 이 아이는 어쩌지? 저분들은 어떡하지?'하고 묻자.

 

 

기억하자. 

'환상은 우리를 위로하려고 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려고 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는 혜윤의 마지막 구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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