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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3

by 곰곰곰곰 2020. 8. 15.

할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 같다. 켜켜이 쌓은 시간은 단단한 벽처럼 내 안에 있다가 어떤 순간들에는 폭우에 산사태가 일어나듯, 곳곳에서 허물어진다.

할머니가 더이상 일어서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용변을 보고, 방 안에 붙박혀 누워있을 때 나는 그저 할머니를 방치해놓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 삶을 제대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한 켠에 묵은 짐을 쌓아놓고, 치우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것처럼. 할머니 용변을 치우고, 몸을 닦아주고, 밥을 먹이고, 들어 옮기고, 씻기고 그렇게 하면서 할머니가 싫고 또 불쌍하고, 할머니가 짠하고 귀찮고,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도 잘 견뎌냈지만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금은 괜히 야멸차게 할머니를 외면한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자꾸 변명을 하고 싶다.

 

인간은 태어나 열심히 살다가 때가 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나도 그것을 안다. 누구에게든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다. 그런데 막상 이 문장이 내 옆으로 오면 자꾸만 내 살을 헤집고, 삶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시간이 섞여버린다. 모든 장소도 혼란스럽다. 나 또한 언젠가 그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지만 막상 현관 앞에서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정신없이 울고 웃느라 바쁘다. 옷을 고르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군인들을 대동하고 온 의사가 환자를 끌어내는 장면을 목격한 것마냥 놀라고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는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나는 저렇게 될 줄 하나도 몰랐어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결백을 증명하듯이, 또는 끌려가는 사람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며 숨을 죽이듯이, 방 안에 들어가 온갖 생각을 하면서. 몇 분 전까지 이 집에 같이 있었는데.

 

수행자는 마음에 대하여 명상을 하여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의 서로 의존하는 본성을 명상하는 것은 또한 마음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대상이 모두 그 자체로 마음이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대상들을 다르마라고 부르지요.

1. 몸과 물질
2. 느낌
3. 지각
4. 정신 작용
5. 의식

이 다섯 가지 범주를 '오온(다섯 가지 쌓여 있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번째 범주인 의식은 나머지 범주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 범주들을 있게 하는 바탕이지요. 탁자에서 우주를 보는 사람은 길을 보는 사람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그대를 이루는 오온의 집합을 명상합니다. 순간순간 세계는 오온을 낳아 기릅니다.

자아란, 오온의 집합과 다름없어요. 오온의 집합인 우리 또한 우주의 모든 사물이 형성되고 만들어지고 파멸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요.

 

깨달은 사람들은 말한다. 세계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세계이고. 세계는 나를 만들고, 나는 세계를 만들고.

달라이 라마의 '용서'에서 읽었던 다이아몬드 그물이 생각난다. 모든 것은 거미줄과 같아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신기하다. 할머니는 나를 만들었고, 나도 할머니를 만들었고, 삶은 죽음으로 가고, 죽음은 다시 삶의 토양이 되고. 모든 존재가 서로의 존재에 기여한다. 나는 '나 아닌 모든 것'들이 있기에 나일 수 있다. 그래서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하나보다.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깨닫고 실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우리를 짓누르지 못합니다. 그대는 해방되었어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숨결을 지켜보며, 남을 위해 죽어간 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상은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하루 일과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하여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요, 내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 뒤로 나는 열너덧 살이나 되었을 어린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꼼짝없이 누워 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죽음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이제 나는 압니다. 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살 줄도 모르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니까요.

우리는 삶과 죽음이 생명의 두 얼굴이며, 동전의 양면이 없으면 동전이 있을 수 없듯이 생명도 삶과 죽음이 없으면 있을 수 없음을 봅니다.

 

남을 위해 죽어간 자에게 물어보라니. 가시에 찔린 것 같다. 모두 나를 위해 살기 바쁜데, 나조차도 대부분의 시간을 나를 위해 보내는데, 실은 남을 위해 죽어간 이가 가장 제대로 살아있는 것 아닌지. 그는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 죽었을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염처경]에 나온 시체 명상을 권한다. 마음이 고요하고 웃음꽃이 필 때까지 육신이 분해되어 뼈까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끈질기게 명상해 보라고. 제대로 죽을 줄 알아야 제대로 산 것이니.

 

 

우리네 전통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세 가지 종류의 현실이 있습니다. 바로 상상, 상호의존성 그리고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이지요. 망각과 편견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그릇된 관점과 견해의 베일로 현실을 덮습니다. 그리하여 상상으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상상은, 현실을 개체와 자아들의 집합으로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요.

궁극적 온전함의 본성 그대로 현실을 지각할 때, 수행자는 이른바 평등성지의 경계에 도달하여 더 이상 주와 객의 분별이 이루어지지 않는 놀라운 합일에 들어갑니다.

그대 마음이 해방될 때 그대 가슴엔 자비의 강물이 흐르게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앉든지, 이 성스런 명을 기억하세요.
"모든 존재를 자비의 눈으로 보아라."

우리 모두의 인생은 저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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