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이 책의 초판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왔다.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려보면 이 책이 큰 파장을 불러온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영혼이 덫에 걸려있었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그동안 태연히 자행되어왔던 죄를 낱낱이 고발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을 단정적으로 서술한다. 나는 작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종류의 단호함은 고통을 겪었으나 고통에 지지 않고 고통을 초월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신감이다. 누가 감히 투덜대며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 매도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고통의 심연까지 내려가 본 적이 있기나 할까. 물러서 고통에 신음하는 자에게 자리를 내줄 마음이 있기나 할까.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애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이다. 길은, 그것이 신작로거나 오솔길이거나 간에,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삶이 길 위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결국 고독한 순례자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순례자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 오직 고행의 가시밭길만 있을 뿐이다.
삶은 곡예다. 맞는 말이다. 삶이란 아무리 다른 수식을 달아도 인수분해를 해버리면 곡예의 곱하기, 또 곱하기인 것이다. 누구의 삶도 분해할 수 있다.
특히나 삶이란 이름의 연극무대에는 어떠한 전제도 의미를 갖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어떠한 반어도 수용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삶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은 다시없다.
그리고 여기 황홀한 비극이있다. 역시 삶이란 이름의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 주장대로 형식을 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주인공 강민주는 절망의 텍스트, 비극적인 연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삶에 굴하지 않는다.
그녀는 길을 만들기 위해, 낡은 생각과 낡은 태도와 낡은 세상을 뒤집고 새로운 시작을 이끌기 위해 기꺼이 외줄 위에 오른다. 운명에 균열을 내는 일은, 관례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불편함을 꺼내고 상처를 꿰매는 일은 즐거움에 기꺼이 할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삶을 수식할 때만 우리는 삶을 바로 볼 수 있다.
삶에 도사리는 절망의 속성을 이해하고, 굴레에 살점을 내준다면 출혈은 크겠지만 결국 우리를 천천히 목졸라 죽이는 폭력과 지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부담없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민주는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지만 타죽는 순간에도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순례를 시작한다. 이유는 하나뿐, 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내가 지나간 가시덤불들, 그것을 사람들은 훗날 '길'이라 부를 것이다.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들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우리가 세상의 계급구조나 이분법을 비판하는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런 작품들이 나약한 자아를 위로하고, 금기에 돌을 던지고, 몰랐던 분노를 대신 터뜨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이 긴 제목은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이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에게, 잠시라도 힘이 되었길 바란다.
양귀자의 이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결국 더 나은 상태에 닿기 위한 존재의 욕구라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닫힌 문을 열고 일어나 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바로 지금에 있다. 지금이 아니면, 이 곳이 아니면 안 된다.
닦여진 길을 타고 달리는 안락함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고,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굳이 과녁을 메고 싸워줄 정도로 선하지 않다. 불행을 잠재우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인데 그마저도 녹록치 않다. 나는 달라지기 위해 모든 편안함을 내려놨는데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강민주가 그랬던 것처럼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오히려 긴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슬픔 안에서 행복의 불씨를 찾는 것이 더 황홀한 일일 것이다. 변화는 더디고 사슬은 너무도 단단하다.
탈것에 올라 빠르게 달리면 주위의 풍경이 뒤로 가고 나는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숨차게 달리는 중이어서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내리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남자는 한 종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왜 안 되는가. 남자들의 동물적인 욕정, 노출된 여자들은 모두 노리개로 파악하는 공공연한 매춘, 구애의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 사회의 고정 관념을 나는 역으로 깨부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치밀하게 행해온 억압이야말로 바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라는 것, 역사의 다른 불행은 선구자들의 반성과 참회로 최소한 극복의 시늉이라도 보여왔지만, 이 끈질긴 불행만은 일부 몇몇 여성들만이, 그것도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거론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의 여성 학대는 아주 교모하고 간악한 수법으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들을.
한 가정의 가장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면, 만약 그렇다면 울타리를 넘어 새어 나오는 비탄과 한숨이 지금보다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결코 '만약'으로 시작해서 '만약'으로 끝나는 가정법이 아니다. 인류는 역사의 시작을 지배와 억압으로 열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남성은 지배하고 여성은 지배당했다.
바뀌어야 한다.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고 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성, 여성이 나서야 한다. 남성들이 강탈해간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 지배할 줄밖에 모르는 남자들에게 지배당하는 수모와 체념의 안락함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경험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으므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 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날고 싶었다. 날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 날개를 말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는 세상의 모든 젖어있는 것들에 강한 연민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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