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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by 곰곰곰곰 2019. 12. 13.

 

★ 나의 한줄평: 사회는 병원이다, 우리는 성과에 미친 자기착취병 말기환자다. 시대를 통찰하는 명의의 진단

 

21세기

신경증적, 긍정성의 과잉
이질성-은 차이로 대체됨-과 타자성-소비주의로 전락-의 소멸
긍정화는 신경증적, 시스템 내재적 폭력을 유발

바이러스(시스템 칩입과 저항)적 사회나 박테리아적 사회, 즉 타자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주요한 면역학적 사회와는 다른 양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됨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 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이라는 용어는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쓰일 수 있을 뿐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 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이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규율사회(부정성. 금지, 명령, 법률 위주. 광인. 범죄자 생산)에서 성과사회(긍정성.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 위주. 낙오자와 우울증환자 양산)로.

생산성의 향상에 부정성과 규율은 한계가 있음. 주체들은 규율사회를 졸업하고 능력의 긍정성으로, 당위에서 성과로 방향을 전환함. (~하면 안돼, 해야 돼 ☞ ~할 수 있어. 능력이 있잖아)
우울증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자아에 대한 압박과 성과를 향한 압박.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 파편화와 원자화, 인간적 유대의 결핍)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우울해짐. 스스로를 노동으로 착취하다가 소진되어 버리는 것. 자유로운 강제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들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포르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체한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있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능동적인 개인의 삶, 모든 인간 활동이 근대에 와서 수동적인 노동과 자아의 상실로 변모해 버렸다고 서술함. 그러나 저자는 이 의견에 반박하며 후기근대의 인간들도 성과와 노동에 휩쓸려 강력한 자아로 무장하고 있다고 주장함. 다만 그 자아가 고립된 삶과 탈서사화된 세계 때문에 불안과 허무를 느끼는 자기착취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뿐. (왜 살지? 왜 일하지? 무슨 의미가 있지? 등의 생각)
사유를 잃고 활동과잉 상태에 빠져버림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인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산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사색적 삶의 회복과 중단하는 본능을 되살리기
즉각 반응하지 않고 천천히 오래 보는 법을 교육하는 것
생각하는 법을 교육하는 것, 읽고 쓰는 법을 교육하는 것

분노의 에너지로 전체를 바라보아야 함. 이는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짜증과는 다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 불안도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의 문제임.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 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쉴 수 있는 사람인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채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음,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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