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존엄한 삶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전공 공부하듯 메모하면서 읽은 책.
뇌를 쓰면서 읽기 시작해 책장이 수월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곱씹으면서 읽고 나니 뿌듯하고 남는 것도 많았다.
이 책은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부제로 달고 있다.
존엄성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언제 존엄하고 언제 존엄하지 않게 되는지, 존엄하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루는책이다.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삶에서 우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느끼고 소망하며 과거의 무엇을 기억하고 상상하고 또 숙고하며 믿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내 행위의 장본인이 되며 내 경험에서 비롯된 행동의 행위자가 된다. 또한 나를 이끄는 동기는 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서 갖는 자화상은 현재 우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인간은 내적 검열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사고, 희망, 공상을 금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문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주체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볼 뿐 아니라 계획을 갖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영향을 미쳐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정체성을 갈고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제어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존엄하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외부의 압박에 의해, 관습이나 권위에 의해 나의 삶이 좌지우지되면 안된다.
이 구절을 적으며 정목스님이 말한 '자유로운 삶'도 떠올랐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상태이다. 감정이나 욕망, 강박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포함한다.
아이들과도 꼭 나누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 한마디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존엄성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구절도 인상 깊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하니까.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고 솔직하게 드러낼 때 좀 더 존엄해지기도 한다.
존엄한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요구할 수 있다. 감정을 구걸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고를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사고한다. 또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내면의 독립적 존엄성이 끊임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신을 포기했을 때, 존엄성은 사라진다.
어려워도 끝까지 자기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면의 독립적 존엄성은 그것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부단한 노력에 있다.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하거나 종종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사고가 홀로 서지 못한다고 해도 존엄성은 다치지 않는다. 존엄은 사물의 기준으로서의 독립성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 또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때 상실된다.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아예 시도를 하지 않았을 때 존엄하지 않은 것이다.
2.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모든 만남은 불안정하다. 우리는 투명하지 않아서 상대가 하는 언행으로만 서로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교차하고 소통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공감하면서 친밀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만날 때는 그들의 이야기 안에 변형되지 않은 경험의 진실이 아닌, 내적 검열을 거치고 자아상의 이익을 위해 여러 차례 고쳐진 동기들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만난다. 이 점 때문에 모든 만남은 불안정하고 변동 가능하며 결말이 불투명하다. 타인에게도 나처럼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때로는 평생 동안 만져볼 수 없는 동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만남은 이렇듯 여러 면에서 무의식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동기 배경을 서로에게 터놓는 것은 마치 그 둘이 교차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은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을 얽는다. 나는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생각해보며 상대방이 나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한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사고의 친밀성을 만들어낸다. 먼저 서로의 생각이 교차되는 경험이 없다면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주체로서의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서로 교차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내 것처럼 이해하면서 내가 만약 그 처지라면 어떤 심정일까 하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상대의 생각과 내 생각에서 비슷한 교차점을 찾아 소통해야 한다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내가 소통에 실패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차점이 없는 상태에서 나의 의도만을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내 말이나 글을 접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직장 상사가 아무리 좋은 업무 팁을 알려줘도 마음 속에 근심이 있다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서로가 되어볼 순 없지만 타인의 입장을 떠올리고, 그들의 처지를 살핀다면 조금 더 소통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학생을 대할 때나 학부모 상담할 때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작년에 마지막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보호자가 생각난다. 그 사람의 입장을 떠올려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일이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내가 자꾸 전화해서 자녀의 안 좋은 점을 지적하고, 사건사고를 전달하니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유난스러울 정도로 방어적인 그 분의 태도도 이해가 된다.
이제 깨닫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맺어봐야지...
내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외부로 반영되고, 상대방은 이 반응에 따라 다시 변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에 연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상호작용의 열기가 생성된다.
개입적 만남은 가까움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까우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겪는지에 무심하지 않다. 분노나 증오에서도 개입적 만남이 있을 수 있다. 그 밖에도 욕망이나 그리움, 동경에 얽힌 모든 종류의 열정적 관계, 그리고 기쁨과 괴로움이 동반된 감정이입의 여러 형태가 이에 해당된다.
가깝고 친밀해지면 우리는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된다.
재미있는 건 가까운 사이의 만남이 기대와 원망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서로에게 특정한 무언가를 바라고, 그의 반응을 신경쓴다. 그의 반응이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변화가 또 상대방에게 영향을 준다.
상대방과의 연대감이 있기 때문에 친밀함과 가까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받고 원망이 이는 것이다.
내가 학생을 대할 때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 달라지고 나아질 것을 기대한다. 조금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속이 터지고 아이가 밉기도 하다. 작년에는 그렇게 기대와 원망을 반복하다 결국 한 명을 포기했다. 보호자 또한 '학교에서 잘했어야지, 선생이 돼서 뭘했냐,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나와서 질려버렸다.
나는 아이에게 관심을 껐고, '그냥 사고만 내지 말아라' 하는 마음으로 걔를 데리고 있었다. 다른 애들을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고 말썽을 부리면 그냥 아이를 마음에 병이 있는 환자라고 생각했다. 점점 그렇게 되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이 힘든지, 내가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소통하려는 시도는 전부 실패로 돌아갔고, 나머지 아이들을 달래면서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나 겪고 있는 일이 궁금해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을 병자로 보는 시선이다. 나는 그를 더 이상 통일된 행동의 행위자이며 챔임자라고 보지 않는다. 그라는 사람은 불가사의한 내부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이 하도 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아서 그를 보는 내 시선이 바뀐 것이다. 기대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다.
그래서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2022년의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고, 죄책감과 분노, 답답함이 되살아났다. 어쩌면 나는 여러번 아이에게 '나는 이미 너를 포기했다'는 사인을 주고, 무관심으로 대하면서 일종의 복수를 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목이나 존경보다 더 강하고 풍부한 것, 인정이 필요하다.
인정은 어떤 이의 노고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인정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인정은 존중이다. 인정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시다.
인정이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정의 효과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상대방의 노고를 인정함으로써 관계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이것이 바로 존엄성에 끼치는 긍정적 효과다.
인정에의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욕구다.
이를 교실에 적용해보면, 교사가 학생을, 학생이 교사를, 학생이 학생을 서로 인정할 때 구성원들이 보다 더 존엄해질 수 있다. 말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도 달라져야 하고, 행동으로써 인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반면에 마땅히 인정해주어야 할 것조차 거부하면 사람은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너의 노력을 무시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그 보호자는 나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고, 소통을 거부하고 나를 비난하면서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얼마나 타인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타인의 수고를 인정하는가?
인정은 정말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에 살아가면서 타인의 수고를 감사히 여기고 꼭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사람과의 논쟁이 없었다면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라는 무게감 있는 이 표현에는 그를 하나의 주체로 보고 상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내가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조망하는 것처럼 그도 세상을 보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목적으로 취급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만남은 대칭성과 상대성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서로 주체로 인정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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