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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계단

by 곰곰곰곰 2020. 9. 10.

★ 나의 한줄평: 계단을 오르는 동안 당신은 성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발전과정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나를 포함해) 보통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고, 언제 변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설득력 있는 문장과 진솔한 감성으로 저자는 자신이 오른 계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즘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모두 부럽다. 나도 이런 수준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사유를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것, 그 통찰력만큼은 인정할만 했다.

 

헤겔은 변증법의 적용을 단지 개인의정신에 한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우주 역시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성장해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편함은 설렌다. 어떤 책 속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방금 새로운 대륙에 도착했다는 존재론적 신호다. 이제 기존의 세계는 해체될 것이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 더 높은 단계에서 나의 세계가 재구성될 것이다. 하나의 계단을 더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을 권한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내가 애써 외면해왔던 반대쪽의 주장에 더 마음을 열어보자고 생각했다. 솔직히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기는 힘들다. 마음 속에서는 반발심이 생겨나고 얼마 못가 감정싸움이 되거나 소통을 포기하게 된다. 오히려 불편함을 권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불편한 지식들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나도 나와 전혀 다른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싸우고, 화해하고, 논쟁하고, 부딪히면서 변화했으니까. 나의 야망을 키우고, 발전을 자극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기보다는 오히려 싫어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불교의 진리와도 통한다. 고통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리라.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사람들이다. 평생을 이상주의자로 살거나, 혹은 평생 한 번도 이상주의자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문제다. 전자는 미성숙해 보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찾을 수 없다.

 

이상에 불타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모든 것에 분노했던 시기와 현실에 치여 내 살 길이나 찾자고 다짐했던 시기를 모두 겪어봐서 그런지 이 구절에 공감이 됐다. 이상주의자는 정의롭다. 열정적이다.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면 때로는 목소리 큰 불만쟁이가 되거나 투쟁적인 외톨이가 되기 쉽다. 반면, 이상 없는 사람은 억척스럽다. 얍삽하다. 자기 손익계산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지혜는 중도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도운이랑 이야기했던 부분과 통한다. 대학시절까지 나는 세계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믿었다. 노력하면 행복해질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권선징악을 신뢰했다. 땀과 눈물의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내려 애썼고, 힘들어도 발버둥쳤다.

조금 더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삶이 우리를 언제든지 똥통에 처박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때로는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착한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세계는 결코 공정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덜 행복해진 걸까. 아니다, 지금 덜 행복할지는 몰라도 더 편안해지기는 했다. 받아들임에서 오는 잔잔한 위로가 나를 감싸고 있다.

 

무상과 무아는 세계의 엄밀한 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고통이 생겨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슬픔을 낳는다.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소멸하고 고통은 사라진다.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붓다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8월, 할머니 건강이 정말 급속도로 악화되고 결국 용변까지 못 가리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내 안의 믿음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팔십 평생을 꼬장꼬장하게 살아온 할머니가 그대로 고꾸라져 허물만 남은 것 같았다. 결국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울어버렸다. '왜 이렇게 됐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지, 이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할머니랑 지내면서 하루종일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계속 속이 허물어졌다가 다시 나아졌다가 또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할머니는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곧 내 세계였다. 눈 앞에서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울컥했다가 그래도 담담한 말투로 나이도 있으시고, 수술한 적도 있고, 늙으면 원래 갑자기 안 좋아지기도 하는 법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흐르는 강물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시간을 멈추거나 과거로 돌릴 수 없다는 걸.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고 망각이다.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그리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아이만이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창조의 과정은 하나의 유희이고 동시에 긍정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신이 죽은 허무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영원할 것이다. 너의 삶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이 고통의 순간은 영원히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래!"하고 외칠 수 있는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당신의 삶 전체를 앞에 두고,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다시 한 번!"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등장했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처음에 나는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 소리야, 불교처럼 업보에 따라 존재가 바뀌어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반복된다고? 개똥같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할 수 있냐고?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하길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는 그저 삶의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경험해보기 위해서라던데. 죽기 직전에는 내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도 찬란한 것이었다고 긍정할 수 있을까.

박경리 선생이 쓴 구절이 맴돈다.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이상적인 이들이 이상적인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서가 아니야. 그들의 내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지. 이상적인 인간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사람이 살면서 남들의 평가나 인정에서 자유롭기는 무지 힘들다. 조금만 뭘 해도, 자의식이 비대해지면서 누군가의 인정을 원하는 내면의 소리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체 게바라에 대한 서술을 읽으며 머릿속에 이상적인 인간으로 김 선생님이 떠올랐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거나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남보다 많은 몫을 맡으려하고, 누군가 칭찬하면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라며 오히려 다른 선생님이 더 고생했다고 겸손하게 타인의 덕으로 돌리고. 애써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모습이 멋졌다. 배려심이 있고 포용할 줄 아는 본받고 싶은 분이다.

오늘 혁신학년 수업자료를 위해 책을 스캔하면서 '아, 너무 하기 싫다. 내가 더 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이런 단순반복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알아차렸다. 좀 부끄러웠다.

 

소사는 보여주었다. 추악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신과 세상을 지켜나가는지를, 놀랍게도 그 방법은 수용이었다. 고결한 이상도, 비루한 현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삶에게 원인과 결과를 묻는 건 가능하지 않아요.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받아들여 해석할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을 지속할 것인가."

 

언뜻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해석하면 일맥상통한다. 삶에서 인과의 법칙을 도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의식으로 세상을 해석해 스스로 구성한 결과를 받아들 뿐이다. 자연에 필연 같은 건 없다.

아홉 번째 계단에서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설명과 열번째 계단 [우파니샤드]에 대한 부분은 명상의 가르침과 정말 많이 일치해서 놀라웠다. 배운 것을 다시 확인하는 느낌. 이럴 때 신기하다. 연금술사에 나오는 표지를 만나는 느낌이다.

 

네 마음이 전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가 있고 너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마음이 세계를 그려낸다. 모든 것은 네 마음의 반영이고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허망해하지 마라. 너는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해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지 마라.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심판하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앞서 이해하고 있기 대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에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 내면의 투영입니다. 물질세계도, 사후세계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나의 내적 세계와 외부의 현상 세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명상과 불교, 또 다양한 책들을 읽고 있다. 그만큼 내가 많은 체험을 해온 것 같아 조금 위로가 된다. 고통도 불행도, 또 즐거움과 행복도 겪어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나'라는 존재에 의해 구성된다. 늘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존재, 그래서 무상한 '나'에 의해.

앞으로 나는 어떤 세상을 꾸밀 것인가. 어떤 틀로 세상을 조립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양귀자의 [모순]에 등장한 구절처럼, 삶은 온 생애를 걸고서라도 탐구해볼만한 그 무엇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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