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희

by 곰곰곰곰 2020. 6. 28.

★ 한줄평 : 하나도 변한 게 없어, 하나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나서부터 오래된 책들을 읽고나서 제일 많이 느끼는 것은 그때와 지금이 참 많이 다르면서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내가 들었던 말, 세상에 떠도는 말들이 토씨만 조금 바뀌었다 뿐이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과거 여성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중력처럼 작용하는 여성을 향한 이런 압박이 얼마나 유구한 개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읽어도 읽어도 들어도 들어도 징그럽다.

 

"그것은 그리 많이 해 무엇하니. 사내니 고을을 간단 말이냐? 군주사라도 한단 말이냐? 지금 세상에 사내도 배워가지고 쓸 데가 없어서 쩔쩔 매는데..."
경희는 이 마님 입에서 '어서 시집을 가거라. 공부는 해서 무엇하니.' 꼭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댁처럼 영감 아들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경희는 굳게 맹세하였다. '내가 가질 가정은 결코 그런 가정이 아니다. 나뿐 아니라 내 자손 내 친구 내 문인들이 만들 가정도 결코 이렇게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 오냐, 내가 꼭 한다.'하였다.

"저는 기어이 하던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죽어도 시집은 아니 가겠다 하는데. 그리고 더구나 그런 부잣집에 가서 치맛자락 늘이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다고 한다오. 그래서 제 동생 시집갈 때도 제 것으로 해 놓은 고운 옷은 모두 주었습니다. 비단치마 속에 근심과 설움이 있느니라고 한다오. 그 말도 옳긴 옳아."

"아이 아니꼬운 년, 그러기에 계집애를 가르치면 건방져서 못 쓴다는 말이야... 아직 철을 몰라서 그렇지..."
 

 

그러나 경희는 결코 지지 않고 계집애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종일 일을 하고 나면 경희는 반드시 조금씩 자라난다. 경희의 갖는 것은 하나씩 늘어간다. 경희는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얻기 위하여 자라 갈 욕심으로 제 힘껏 일을 한다.

경희의 앞에는 지금 두 길이 있다. 그 길은 희미하지도 않고 또렷한 두 길이다. 한 길은 쌀이 곳같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토요, 가기고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한 길에는 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 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 주어야 겨우 몇 푼 돈이라도 얻어 보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뿐이요, 사랑의 맛은 꿈에도 맛보지 못할 터이다. 발부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돌을 밟아야 한다. 그 길은 뚝 떨어지는 절벽도 있고 날카로운 산정도 있다. 물도 건너야 하고 언덕도 넘어야 하고 수없이 꼬부라진 길이요, 갈수록 험하고 찾기 어려운 길이다. 경희의 앞에 있는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오늘 택해야만 하고 지금 꼭 정해야 한다. 오늘 택한 이상에는 내일 바꿀 수 없다.

경희도 여자다. 더구나 조선 사회에서 살아온 여자다. 조선 가정의 인습에 파묻힌 여자다. 여자란 온량유순해야만 쓴다는 사회의 면목이고 여자의 생명은 삼종지도라는 가정의 교육이다. 일어서려면 압박하려는 주위요, 움직이면 사방에서 들어오는 욕이다. 다정하게, 손 붙잡고 충고 주는 동무의 말은 열 사람 한 입 같이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읍시다" 함이다.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자고, 네가 가려는 길은 발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욕설과 고난이 난무하는 험난한 길이라고 모두가 말한다. 경희에게도 말하고, 나혜석에게도, 허난설헌에게도, 신사임당에게도, 모두 그렇게 말했겠지.

경희는 "아이구, 어찌하면 좋은가" 죽은 자처럼 차디찬 몸으로 외마디를 내뱉는다.

 

지금 내 상황 같다. 미래는 너무 멀어 잘 보이지 않고 과거는 이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세상이 하는 말이 개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편한 길을 떨치고 애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지 매 순간 고민한다.

 

경희는 아버지의 말에 용감하게 여자도 사람이라고 대꾸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떨려 하면서 사람 노릇이 쉬운 것이 아니고, 사천 년래의 습관을 깨뜨리고 나서는 여자가 웬만한 학문, 여간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고 자신없어한다. 웬일인지 평소에 동정했던 비녀 꽂은 부인네들이 대단해 보이고, 모두 장해 보인다. 차라리 가정을 이루며 시집 가 사는 이들의 모습이 훨씬 나은 딴 세상 같다.

 

'어떻게 저렇게들 쉽게 비녀로 쪽지게 되었나? 어쩌면 저렇게 자식들을 많이 낳아 가지고 구순히들 잘사누. 참 장하다.'

'그 부인네들이 장한가? 내가 장한가? 이 부인네들이 사람일까? 내가 사람일까?' 이 모순이 경희의 깊은 잠을 깨우는 큰 번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장한 사람이 되나?'하는 것이 경희의 머리가 무거워지는 고통이다.

그렇다. 괴로움이 지나면 낙이 있고 울음이 다하면 웃음이 오고 하는 것이 금수와 다른 사람이다. 금수가 능치 못하는 생각을 하고 창조는 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번 쌀, 사람이 먹고 남은 밥찌꺼기를 바라고 있는 금수, 주면 좋다는 금수와 다른 사람은 제 힘으로 찾고 제 실력으로 얻는다. 이것은 조금도 모순이 없는 사람과 금수와의 차별이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나님의 딸이다.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내게 있는 힘을 다 하여 일하오리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시옵소서.

 

경희는 전 인류의 여성이다. 그리고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내 힘으로 살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 것이다. 경희가 그랬듯이. 앞으로의 많은 여성이 그럴 것이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풍의 언덕  (0) 2020.07.30
좁은 문  (0) 2020.07.12
공중그네  (0) 2020.06.03
당신 인생의 이야기  (0) 2020.05.29
용서3  (0) 2020.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