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줄평: 테드 창, 미안해. 나는 어쩔 수 없는 문과생이었나봐.
더 많이 알았다면 더 신선하고 즐겁게 읽혔을텐데. 아쉬움이 드는 책이었다. 과학적 배경지식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창의적인 시도 덕분에 이 책이 꽤 인기가 많은가보다.
바빌론의 탑: 하늘까지 닿는 탑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는 테마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올라간 천장의 끝이 결국 땅과 맞닿아 있었다니 정말 기묘한 이야기다. 자연은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은 그 규칙을 통달해 지구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모양새였다. 그러나 내가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하늘의 끝이 지상의 가장 낮은 곳과 한통속이라면?
이제는 왜 야훼가 탑을 무너뜨리지 않았는지, 정해진 경계너머로 손을 뻗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왜 벌을 내리지 않았는지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몇십 세기에 걸쳐 역사한다고 해도 인간은 천지창조에 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인간은 야훼의 업적에 깃든 상상을 초월한 예술성을 일별하고, 이 세계가 얼마나 절묘하게 건설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 세계를 통해 야훼의 업적은 밝혀지고, 그와 동시에 숨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0으로 나누면: 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르네와 그런 르네를 견디지 못하는 칼. 2차원에서는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3차원에서 보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꼬인 위치 같았다. 이야기 속에서 형식체계로서의 수론은 사랑의 원리와 비슷한 모순을 품고 있다.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하지만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순말이다.
1=2라는 명제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연인은 없다. 이혼을 예견하며 결혼하는 커플은 없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결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함 없을거라 믿어왔던 질서에 금이 간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할까?
"나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신학자가 된 느낌이었어. 그럴까봐 단순히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아는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같아?"
"아니"
"그 느낌을 당신에게 전할 수는 없었어. 내가 마음속 깊이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는 결국 진실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으니까."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힐베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수학적 사고에 결함이 있다면 우리는 진실과 확신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학의 명제가 현실에 관한 어떤 설명을 제공하는 한 그것은 불확실하며, 명제가 확실하다면 그것은 현실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네 인생의 이야기: 여기까지 오니 테드창은 모순과 아이러니를 풀어놓는데 능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세월의 책이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알고도 현재의 선택을 조절할 수 있을까?
이야기 속에서는 두 가지가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미래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미래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출발한 다음에는 진로를 수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특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이전의 경로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표가 없다면 '가장 빠른(좋은)' 경로라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한 선택들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선택이 결과를 불러온다. 결과를 불러오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현상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일은 얼핏보면 이상하지만 실은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모순은 우리의 일상이다.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사실 한 가정 안에서 이 두 언술이 공존할 가능성을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타당한 해석이다. 문맥이 이 문장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할 뿐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지옥은 신의 부재: 신은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다. 내가 그래서 무신론자인가보다. 신앙도 모순이구나. 신의 자비를 바라고 그럴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그냥 그가 있기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들어도 신기하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실제로 이런 장치가 발명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때로는 별 것 아닌 게 별 것이지 않나.